컨텐츠 바로가기

07.03 (수)

[레이더P] 1986년 레이캬비크 회담과 2018년 싱가포르 회담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지난 16일 러시아월드컵에서 최강팀 아르헨티나와 1대1 무승부를 이끌어내며 이변을 연출한 아이슬란드. 이 나라 수도가 인구 10만명 남짓의 레이캬비크(Reykjavik)다. 아이슬란드 최대 항구도시이자 온천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1986년 레이캬비크 회담…비난 폭풍
매일경제

레이캬비크 회담이 열렸던 장소[사진=pixabay]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32년 전인 1986년 이 도시에서 회담이 있었다. 레이캬비크 회담이다. 이 회담은 1986년 10월 11~12일 양일간 열렸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지목하며 냉전 체제로 긴장감이 크게 고조됐던 시기다. 레이건 대통령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 간에 정상회담을 통해 핵무기 감축 문제를 협의했으나 아무런 합의문도 채택하지 못했다.

다수 언론에서는 레이캬비크 회담을 실패로 규정했고 비판이 이어졌다. 당시 이코노미스트지는 고르바초프가 서유럽과 미국을 이간질하려는 전략을 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소련, 전략무기 50% 감축 용의
협상 테이블에 오른 문제의 핵심은 전략방위구상(SDI)이었다. SDI는 대륙간탄도탄과 핵미사일 등을 격추시키는 방법에 관한 미국의 연구 계획을 말한다. 미·소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전략무기 감축과 관련한 파격적인 양보를 거듭하며 미국에 SDI를 사실상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향후 10년간 SDI를 실험실 수준으로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당시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모든 공격 전략무기를 일방적으로 50% 감축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레이건은 SDI를 포기한 것처럼 비칠 경우 미국 내 반발과 그로 인한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좁아질 것을 우려해 이 요구를 거부했다. 정상회담도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난 것으로 보였지만 이 같은 만남이 향후 협상 진전의 도화선이 됐다.

두 정상 의지 확인…소련 개방의 단초
레이캬비크 회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역사적 재평가를 받았다. 두 정상은 상대가 군비 감축에 대한 의지가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정상회담을 통해 모든 핵무기의 폐기라는 비전을 전 세계에 선포했다는 것만으로 그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중거리핵무기(INF)를 모두 없애는 옵션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고, 이는 미국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매일경제

1985년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과 미하일 S.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스위스 제네바 회담[사진=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레이건은 레이캬비크와 그 전해 제네바 회담으로 고르바초프가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며 "그 덕에 이후 협상이 가능하겠다는 판단도 섰다. 두 사람의 교감이 후속 협상으로 이어졌다"고 그 의미를 평가했다. 고르바초프는 미·소 정상회담을 통해 소련 내 자신의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이후 내부적으로 개혁과 개방이라는 흐름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회담을 통해 핵무기를 대폭 감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후속 회담으로 구체적 성과
이듬해 12월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INF협정에 서명했다. 미국과 소련은 3년 안에 양국의 모든 INF를 폐기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사정거리 500~5500㎞의 지상 발사 탄도미사일 및 순항미사일을 폐기하기로 했다.

미·소 간 최초의 합의인 만큼 그 의미가 컸다. 특히 상호 검증을 통해 폐기 여부를 확인한 것이 중요한 합의사항으로 꼽히는데 비밀주의를 선호하던 소련의 큰 변화를 암시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르바초프는 SDI 제한 요구를 철회했고 레이건도 탄도탄 요격미사일(ABM) 금지조약에 서명했다.

3년 후인 1990년에는 2005년까지 화학무기 보유량을 500t으로 줄이기로 합의하고 그 이듬해에는 1단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I)에 서명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후 1989년 12월 3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몰타에서 만나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싱가포르 회담, 혹평 속 후속 미·북회담 준비
매일경제

한국전쟁 이후 70년 가까운 적대관계를 유지해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 오전 싱가포르 센토사 섬의 카펠라 호텔에서 처음 만나 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12일 미·북 간 정상회담 이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환상적인 만남이었으며 수많은 분야에서 진전이 있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합의문의 내용만 놓고 보면 상징적이면서 포괄적인 것이 많고 구체적인 부분은 부족해 보인다는 지적이 나왔다.

미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2일 싱가포르에서 이뤄진 사상 첫 미·북정상회담에서 북한에 너무 많은 것을 양보했지만 대가로 받은 것은 너무 적다며 비난했다. 특히 미·북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를 공동성명에 명시적으로 넣지도 못한 채 한미 연합훈련 중단 등을 약속한 것을 두고 성급하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지난 14일 방한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합의문에 CVID가 빠진 것에 대해 "장담하건대 '완전한(Complete)'이란 말은 '검증 가능한(Verifiable)'이란 말을 아우르는 것"이라며 "누구도 검증 없이 완전한 비핵화를 할 수는 없다"고 반박한 바 있다.

김정범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