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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매경포럼] 청년정치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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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6·13 지방선거 전 고향에 계신 75세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당이고 뭐고 나는 무조건 젊은 사람 찍을란다. 닳고 닳은 정치인은 이제 싫다." 보수당 지지자이셨던 어머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6·25전쟁을 겪은 세대답게 안보를 중시하며 보수정치 편에 섰던 어머니가 확 변한 것이다. 계기는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 사건과 남·북·미 관계의 급변이었다.

올해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조카. 그가 선거를 대하는 자세는 '이념 프레임'이 아니었다. 조카는 "기존의 꼰대 정치인들과 다른 사람에게 표를 주겠다"고 했다. 진영논리도, 권위적인 것도 싫고, 갑질을 일삼는 것은 더더욱 싫다는 19세는 '누가 청년들의 삶과 생활을 바꿔줄 것인가'를 따져보는 '생활 프레임'으로 접근했다.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보수 침몰'은 콘크리트 지지층의 변심, 쿨한 조카 세대 등장과 무관치 않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시대정신은 급변했는데 보수 야당만 이를 가볍게 여겼다. 탄핵과 대선 패배 이후 책임지는 이도 없었고 한반도 정세 격변기에 새로운 담론이나 실력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반공, 색깔론, 종북 같은 '과거 히트상품'은 어머니와 조카가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수는 전통적인 것을 지키며 점진적으로 변화하려는 경향이다. 러셀 커크는 저서 '보수의 정신'에서 보수주의의 핵심가치로 초월적 질서에 대한 믿음, 급격한 개혁보다 신중한 개혁에 대한 선호 등을 꼽았다. 하지만 우리 사회 보수 정치인들이 보여준 행태는 이런 가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보수라는 단어는 권위적인 정치, 막말하는 품격 없는 정치, 남 탓만 하는 정치, 사익을 추구하는 정치와 등치되고 있다. 지금 야당 정치인들은 보수를 재건하겠다고 야단법석이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란 플래카드를 걸고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신파조의 자아비판, 유체이탈식 반성은 감동을 주지 못한다. 합당, 이합집산 같은 정치공학적 선택도 이제 안 통한다. 보수(保守)를 보수(補修)하는 최선의 방법은 인적 쇄신, 물갈이밖에 없다. 결국 사람의 문제다. 참패의 결정적 원인은 식상한 '올드보이들'을 대거 출격시킨 데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세대교체가 더딘 곳이 정치판이다. DJ 때인 2000년대 초 386세대가 대거 정계로 진출한 이후 젊은 피 수혈은 중단됐다. 386들이 더 문호를 열었어야 했지만 이들은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했다. 20대 국회의 평균연령은 55.5세다.

우리만 정치에서 나이와 경험을 최고로 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39세에 당선됐고,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46세), 제바스티안 쿠르츠 오스트리아 총리(31세), 비르지니아 라지 로마 시장(39세)은 모두 젊다. 유럽인들이 괜히 이들을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변화의 시대에는 연륜보다 용기와 돌파력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보수가 살기 위해서는 신인을 대거 흡수해 늙은 정치 생태계를 젊게 바꿔야 한다. 여권도 젊은 정치로 혁신하지 않으면 2년 뒤 국민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가뜩이나 청년문제가 심각한데 국회의원 300명 중 100명쯤은 청년세대가 들어가 제 목소리를 내면 어떨까 싶다.

이번 선거의 수확이라면 세대교체를 이루려고 선거판에 뛰어든 청년들이 부쩍 늘었다는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기초·광역 단체장과 의회에 도전장을 낸 2030세대(만 40세 이하)는 모두 522명에 달했다. 2014년 지방선거(458명)에 비하면 64명이 늘었다. 당선인도 105명에서 199명으로 증가했다.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출마한 28세 신지예 녹색당 후보는 1.67%(8만2874표) 득표율로 4위를 차지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청년에게 힘이 되는 정치를 공약한 27세 정한도 씨와 이현우 씨는 각각 용인시의원과 밀양시의원에 당선됐다. 30대들이 "풀뿌리 정치를 바꿔보자"며 의기투합한 모임인 '구의원 출마 프로젝트'의 도전도 신선했다. 이 모임 소속인 전직 기자, 회사원, 학원강사 등 4명은 무소속으로 구의원에 출마했다. 당선에는 실패했지만 동네 기성정치부터 바꿔보겠다는 젊은 피들의 도전은 헛되지 않았다.

이제 꼰대정치 말고 청년들의 쿨한 정치를 보고 싶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 새사람이 옛사람을 대신하는 게 만고의 진리다.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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