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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레이더A] 김정은이 본 `싱가포르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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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미·북정상회담이 막을 내린 12일 늦은 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날 한밤중에 나선 깜짝 싱가포르 시티투어 코스를 걸어봤다. 김 위원장은 '세기의 담판'을 앞두고 두문불출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오후 9시께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리수용 당 부위원장 등 북한 고위급 인사들과 숙소를 나왔다. 김 위원장은 2012년 집권한 뒤 중국에 두 번, 판문점에 간 게 전부다. 싱가포르는 김 위원장이 집권 후 방문한 첫 서방국가다.

낮보다 밤이 훨씬 더 멋있는 곳이 싱가포르다. 김 위원장은 첫 행선지인 초대형 식물원 '가든스 바이 더 베이'에서 수천 개의 LED 조명을 단, 높이 50m의 슈퍼트리(인공 나무) 사이를 거닐며 외계 행성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형형색색의 꽃과 향기가 가득한 플라워 돔에선 시원한 에어컨 바람 덕분에 김 위원장은 인민복 차림인데도 산뜻하게 셀카를 찍지 않았을까. 싱가포르의 랜드마크인 마리나베이샌즈 호텔 57층 전망대 '스카이파크'에 올랐을 땐 암흑천지인 북한의 도시가 떠올랐을지도 모르겠다. 화려한 불빛을 머금은 싱가포르의 야경과 역동적인 스카이라인은 북한의 현실에 비춰보면 비현실적이었을 것 같다. 북한에서 듣는 통제된 박수와 다른, 시민들의 자유로운 환호도 귓가에 맴돌았을 것이다.

조선중앙통신은 미·북정상회담 직후 "김정은 위원장이 싱가포르의 훌륭한 지식과 경험들을 많이 배우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싱가포르의 밤이 김 위원장에게 꽤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다. 싱가포르 매체들은 싱가포르의 밤을 '자본주의의 결실'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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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북정상회담 결과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물론 허무하게도 김 위원장의 모든 행보가 쇼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이 비핵화에 임하며 예고 없던 시티투어처럼 개혁·개방을 선언할지도 모른다. 김 위원장의 머릿속을 알 길은 없지만 사상 첫 미·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은 국제 무대에 데뷔했고 한국을 비롯해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과 새로운 관계를 열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김 위원장은 젊고 경제 발전에 관심이 있다. 북한의 개혁·개방을 지원하려는 곳도 많다. 한·중·일만이 아니다.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아세안)의 기업들도 벌써부터 북한 정보를 수집하며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동남아는 북한과 수교 관계를 맺고 있고, 평양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한 소식통은 "아세안에도 상당한 자금을 굴리는 기업들이 있다"며 "북한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참에 한국을 비롯해 국제 사회가 북한에 여러 버전의 '싱가포르'를 보여주면 어떨까. 김 위원장이 경험한 '싱가포르의 밤'이 북한의 현실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 말이다.

[임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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