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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7 (일)

치열한 예술혼의 두드림…벽, 세상을 향한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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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미술관 ‘그림이 된 벽’전

라스코 동굴벽화의 유산 지닌 프랑스 작가 8명의 대작 전시

물질과 표면 이미지 관계 탐구 ‘쉬포르 쉬르파스’ 운동 연장선

회화의 개념 재정립, 영역 확대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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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에 바지를 입은 한 남성이 경기도미술관 전시장으로 들어왔다. 모히칸 머리 모양을 한 이 남성은 전시장 벽면 앞으로 쓱 걸어가더니 1분가량 즉흥 춤을 추고 홀연히 사라졌다. 일본 시즈오카 거리 축제 예술감독 마사키 고가였다. 거리 축제 전문가로 유명한 그는 5~7일 안산국제거리축제에 왔다가 경기도미술관의 ‘그림이 된 벽’전에 들러 춤을 춘 것이다. 미술관 직원이 운 좋게 무용 장면을 찍었다. 최은주 관장이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알려졌다. 8일엔 안산국제거리축제에 참여한 요스케 이케다가 8분간 팬터마임을 공연했다. 최 관장은 회화와 무용이 교감한 잊지 못할 이벤트로 기억한다.

마사키와 요스케의 무대 배경은 각각 올리비에 노틀레의 ‘딱딱한 벽, 즐거운 우리집(회화가 내게 편지를 쓰다)’과 수아직 스토크비스의 ‘선형’이다. 지난달 19일 개막한 ‘그림이 된 벽’전에 출품한 ‘벽화’다. 프랑스의 도멘 드 게르게넥 미술관과 공동 기획한 이 벽화전엔 8명의 프랑스 작가가 참여했다.

마침 프랑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회화가 생겨난 곳이다. 기원전 1만5000~1만년 라스코 동굴 벽화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함께 미술사에서 처음 분석하는 대상이다. 이 그림을 두고 실용과 주술 목적이라는 분석이 많지만 충동이나 유희, 장식욕의 소산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이번 전시에서 1만~1만5000년의 시간이 흐른 뒤 벽화가 도달한 현재의 현대회화 지형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참여 작품은 1970년대 전후 예술운동 ‘쉬포르 쉬르파스(Support-surface)’ 연장선에 있다. ‘바탕’을 뜻하는 쉬포르(Supports)와 ‘표면’을 의미하는 쉬르파스(Surface)의 합성어인 이 예술운동은 회화의 바탕을 이루는 물질과 표면 이미지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탐구했다고 한다. 미술관은 “캔버스를 프레임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떼어내거나 그 개념을 재정립하는 등 회화를 해체하면서 회화 영역을 확장하려 한 예술운동”이라고 설명한다.

클레르 콜랭-콜랭의 ‘무제’(2018)가 쉬포르 쉬르파스 개념에 잘 들어맞는다. 이 작가는 끌개로 전시장 벽면을 긁어 홈을 파낸 뒤 페인트로 칠했다. 오래된 유화의 갈라진 균열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벽화는 무계획, 난개발 도시의 난마 같은 도로망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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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의 작가 중 가장 주목을 많이 받은 크리스티앙 자카르의 작품도 이 예술운동의 맥락을 드러낸다. 그는 연소성 젤을 벽에 바른 뒤 불을 붙여 수천 개의 단일 추상 패턴을 만들어냈다. 회화의 전통 재료를 쓰지 않았다. 작품명 ‘그을음의 악보’처럼 오로지 불의 타오름과 번짐, 꺼짐의 흔적이 벽면에 가득하다. 전시작 중 가장 압도적인 작품이다.

‘벽화’전은 경기도미술관이기에 가능했다. 2012년 완공된 미술관의 전시장 높이는 8.5m다. 웬만한 무대 규모를 넘어간다. 이 정도 높이의 전시장을 갖춘 미술관은 드물다. 이미 로비엔 이상남의 가로 46m, 세로 5.5m의 벽화 ‘풍경의 알고리듬’이 들어섰다. 1·2층 통로 벽에 제작된 대형 설치 벽화 강익중의 ‘미래의 벽’은 가로 72m, 세로 10m다. 벽화전은 경기도미술관으로선 필연에 가까운 전시인 셈이다. 이전 프랑스 고성(古城)에서 벽화 프로젝트를 진행한 참여 작가들은 자기 생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전시장 규모에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경기도미술관과 빼놓을 수 없는 건 ‘세월호 참사’다. 미술관 바로 앞 화랑유원지 제2주차장엔 세월호 정부합동분향소가 4년간 자리를 지켰다. 미술관은 2016년 세월호 희생자 추념전 ‘사월의 동행’을 열었다. 노순택, 서용선, 안규철, 조소희, 최정화 등 22명(팀)이 참여했다. 박근혜 정권 때였다. 최은주 관장은 “미술관도 작가들도 전시를 앞두고 여러 압력을 받았다. 지금도 고마운 건 22명의 작가 중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전시에 참여한 것”이라고 했다. ‘그림이 된 벽’전 작가 8명 전원이 철거 전 분향소를 찾았다. 아마도 외국인 중에선 마지막 참배자일 것이다. 크리스티앙 자카르는 참배 직후 유리판을 구해달라고 한 뒤 바로 작품을 만들어 미술관에 기증했다. 참사 희생자를 기리며 제작한 작품이다.

전시는 6월17일까지. 벽화는 전시가 끝나면 사라진다. 미술관은 다음 전시를 위해 다시 벽면을 흰 페인트로 칠할 예정이다. 끌로 파낸 흠은 메꾸고, 불태워 만든 그을음은 긁어내 페인트칠을 한다. 작가들은 “소멸되기 때문에 더 의미 있다”고 했다.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페인트 덧칠 아래 작품의 흔적은 미술관이 존속할 때까지 살아 숨 쉴 듯하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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