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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목)

[시론]백장미의 눈물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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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상문 소설가·前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


지난해 10월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이 대한민국을 강타한 것은, 올해의 한겨울인 1월의 끝자락이었다. 그 운동을 촉발시킨 사람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힘을 가졌다’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고, 더욱이 그가 소속된 ‘막강한 힘을 가졌다’는 조직 안에서 당했다 하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도 남았다.

그는 얼음 같은 냉혹한 마음으로 작정하고 행동했을 테고, 그로 인해 그 조직이 극심한 이상현상을 일으켰을 테니 어쩌면 그 무렵의 기후현상과 딱 들어맞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에 잇따라 문인?연극 연출가?배우?정치가 등등 주로 문화계를 비롯한 정치계에서 스무 명이 넘는 ‘저명인사’들이 미투 운동의 대상이 됐고 그 가운데 두 명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일까지 생겼다.

이즈음 대한민국 남성들의 대부분이 동토에서 한 계절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일찍이 피해자라 소리치다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여배우는 애써 무시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무심한 세월이 넉 달이 흘렀다. 그사이에 동계올림픽과 남북정상회담이 차례로 열리면서 세인들의 관심이 이리저리 쏠리다보니 모르는 사이에 미투 운동이 고비를 넘어선 느낌이다. 네티즌들만 아직 뜨겁다.

만일 여기서 마무리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터이다. 역설적인 표현을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할 사람들이 다 해서 더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다면, 그 얼마나 좋겠는가. 미투 운동이 과거사 속의 한 일화로 기억되고 말 테니 말이다. 한때 리얼미터 오프라인의 여론조사에서 긍정 반응이 70%가 넘었고, 인쿠르트 온라인 여론조사에서도 같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여론조사를 하고 있는지 없는지, 발표된 결과를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지금 왜 이런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인가.

미투 운동은 사법기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중에게 폭로?호소하는 형식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해시 태그 캠페인’이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아무리 여성 혐오, 성폭행 등의 피해 경험을 얼음 덩어리 같은 심정으로 공개해서 가해자를 대중의 심판대 위에 내세워 놓았더라도 대중의 관심이 멀어진다면 그 뒤에 만신창이가 된 피해자만 남을 수밖에 없다. 결국 자신이 제2차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느 세력의 시위처럼 그 끝에 영광이 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래서 피해자들을 동정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비난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때 동원되는 것이 외국의 사례다. 유럽 국가들에서 특히 프랑스를, 아시아 국가들에서 특히 일본을 예로 들어 국민성을 운운한다. 왜 그들은 무심한가를 이야기한다. 남녀관계는 터지자마자 흥미 거리가 되게 마련이고, 흥미가 떨어지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마나한 일이 된다는 것. 그래도 그 정도면 좋은데, 피해자가 2차 피해만 본다고 주장한다. 틀림없는 위선자들의 태도다.

정부도 별로 다르지 않다. 분야별 신고상담센터를 만들어서 운영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뒤에 예산 타령을 하더니 그만인 것 같다. 그 조직부터가 어찌돼 있는지 모르겠고, 그동안 어떤 활동을 어떻게 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동안 그 얼음 같은 마음으로 각오하고 행동한 사람들은 어쩌면 좋단 말인가. 또 그들에 의해 대중의 심판대에 올려진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국회의원들이 발의했다는 ‘여성폭력 방지법’이며 ‘미투 운동법’이 국민들이 내는 세금만 때 맞춰 죽이고 있는 국회에서 결의돼,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차례로 제정되고 시행되기만을 하세월을 기다리겠다는 것인지. 몇 차례 대통령이 아는 체를 했는데도 그러고 있으니 놀랄 일이다. 이루어진 일은 국회의원 몇이 백장미를 가슴에 달았고 지방정부 한 곳에서 백장미 브로치를 달고 잠시 참여 캠페인을 벌인 일 정도다.

이제 어디서 나서야 하는가?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고 앞날을 위한 대책을 세워 시행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정부다. 대중은 국민이다. 그리고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도,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도 국민이다. 이들의 인권이 피차 만신창이가 됐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이미 드러났고 시비가 일고 있다면, 그때 정부가 나서서 정리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곳에서도 나서지 않으려 하니까. 그렇게 국민들이 방치되고 있는 상태니까. 그래서는 결코 건강한 나라가 될 수 없으니까.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앞날이다. 여기저기서 제시된 대안들의 공통점인 “남성 중심적 권력 구조를 개혁”하여 “여성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이 정부가 나서야 한다. 빨리 나서서 빨리 현실적인 대안을 만들어 실질적으로 운영해 나가야 한다.

이상문
소설가ㆍ前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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