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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수)

[오후 한 詩]누군가의 시/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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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먼저
쓰고 있다

누군가 먼저
시를 쓰려고
내 책상에 앉아 있다

그날 하루
종 친 기분

나는 독자
너의 시를 읽으려고 나타난 구독자

누군가의 시는 삼엄해서
들어갈 틈이 없다

누군가의 시는 헐렁해서
양쪽에서 당겨 주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의 시는 너무 가난해서
주머니를 털어 줘야 한다

시에서 만난 사람들
도둑질하는 소년과
성냥을 쥐고 있는 소녀

나는 성냥 한 갑 사서 주점으로 간다
맥주를 마시려다가 시인에게 주고
마지막 문장을 기다린다

그의 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고칠 수가 없다

죽은 물고기,
바다로 돌려보낼 수가 없다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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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시 쓰기와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필패를 적고 있다. 시를 쓰다 보면 이른바 '시인'이라고 칭해지는 그리고 뼈와 살로 이루어진 '내'가 쓰는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쓰고 있는 듯할 때가 있다. 시는 때때로 그런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분명 내가 쓰고는 있지만 '나'라고 말할 수 없는 "누군가"가 쓰는 게 시다. 물론 이는 '접신 상태'나 '영매로서의 시인'이나 세속화된 낭만주의 혹은 도용된 신비주의에 기대는 말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시는, 이 또한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문자를 이루어 나가는 기제로서의 '내'가 쓰는 것인 듯하다. 그래서 한번 쓴 시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고칠 수가 없다". 우리 인생이 그렇듯이 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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