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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분수대] 싱가포르와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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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현상 논설위원


지난해 여름 싱가포르에서 ‘형제의 난’이 벌어졌다.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남긴 낡은 저택의 처리 때문이었다. 2015년 타계한 리 전 총리는 이 집을 성역으로 만들지 말고 허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장남인 리셴룽(李顯龍) 현 총리가 유언을 어기고 이 자리에 기념관을 지으려는 낌새가 보이자 남동생과 여동생이 들고일어났다. 이들의 갈등 뒤에는 ‘3세 세습’이라는 민감한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리 총리가 아들 리훙이(李鴻毅·31)에게 권좌를 넘겨주려는 계획에 따라 부친의 우상화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 동생들의 의심이다.

화려하고 높은 마천루는 다르지만, 싱가포르의 정치는 북한과 닮은 구석이 있다. 바로 ‘패밀리 통치’다. 리 총리의 부인 호칭(何晶)은 국부펀드 테마섹의 최고경영자고, 문제의 아들 리훙이는 공공기술부 산하 기관의 책임자다. 리 총리에게 반기를 든 동생들마저 각각 싱가포르민간항공국(CAAS) 회장, 국립 뇌신경의학원 원장 등의 요직을 맡고 있다. 외신에서 이들 가족을 ‘퍼스트 패밀리’라 부르는 이유다.

흔히 리콴유-리셴룽으로 이어진 권력 승계는 박정희-박근혜와 비교되지만 사실 김일성-김정일과 더 닮았다. 부친의 피살 이후 한때 어둠의 시간을 보냈던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달리 김정일과 리셴룽은 부친의 그늘에서 차근차근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3세 세습 논란과 이 과정에서 벌어진 형제간 갈등마저 비슷하다. 사형과 태형, 무지막지한 벌금, 실질적인 1당 체제로 국민을 묶어 놓는 권위적 통치도 북한과 통한다. 물론 그 정도는 다르지만. 한 서구 언론인은 싱가포르를 ‘사형제도로 유지되는 디즈니랜드’라고 비꼬기도 했다.

북·미 정상회담 장소가 싱가포르로 결정되자 북한과 싱가포르의 인연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북한이 한국보다 3년 가까이나 먼저 싱가포르 통상대표부를 설치할 정도로 두 나라 관계는 좋다.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가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해 머문 적도 있다. 박정희를 덩샤오핑(鄧小平),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동렬로 극찬한 리콴유였지만, 북한은 그가 사망하자 ‘우리 인민의 친근한 벗’이라는 표현을 담은 조전을 보냈다.

북한 정권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체제 보장이다. 무리한 핵 개발에 나선 것도, 갑자기 대화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인민의 삶이 무너져서는 체제가 오래갈 수는 없다. 정치는 비슷하더라도 경제의 길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김정은 위원장이 이번 싱가포르 방문길에서 느꼈으면 한다.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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