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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서승욱의 나우 인 재팬] 외국손님 3000만의 그늘 … ‘관광 공해’에 비명지르는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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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연연하다 발등 찍은 관광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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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중국인 관광객들이 만화 ‘슬램덩크’에 나온 가마쿠라시 전철 에노덴을 찍고 있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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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코(舞子·수습 과정에 있는 예비 게이샤)에게 사진을 찍자고 부탁할 때는 친절하게 해 주세요. 다다미방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으세요. 다른 곳에서 산 음식을 들고 식당에 들어가지 마세요. 식당 예약 취소는 임박해서가 아니라 미리미리 해주세요. 신사나 사찰에 들어갈 때는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어주세요.~”

일본 교토(京都)시가 외국인들을 상대로 배포 중인 ‘교토 아키마헨(간사이 방언·이러면 안 돼요)’ 팸플릿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교토시는 삽화까지 섞어 영어·중국어판을 만들었다.

‘어쩌다 이런 상식적인 매너를 소개하는 팸플릿까지 따로 만들었을까’ 싶지만 효과는 꽤 괜찮다고 한다. 그만큼 초보적인 예절을 지키지 않는 관광객이 많기 때문이다.

# “샤신오 돗테 모라에마스카(사진 좀 찍어주실 수 있나요).”

지난 6일 도쿄 긴자(銀座) 중앙로에서 마주친 남미 관광객이 기자에게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긴자의 상징인 와코 백화점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어줬다. 그다음엔 영국인 커플, 중국인 단체관광객도 같은 부탁을 해왔다.

외국인 관광객 6년 사이 5배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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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시가 외국인 관광객에게 배포한 매너 팸플릿.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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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의 긴자는 차량이 통제돼 ‘보행자 천국’으로 바뀐다. 그곳의 절반 이상은 분명 외국인 관광객이다. 몰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번화가’라던 긴자의 명성에도 금이 가고 있다. 고급 상점 앞 대리석 조형물엔 ‘여기에 앉지 마시라’는 경고문이 중국어·영어·일본어로 써 있다.

또 과자 봉지 하나 찾기 어렵다던 2010년대 초반까지의 긴자 거리와는 청결 상태도 완전히 딴판이 됐다.

일본을 찾은 외국인 수는 2017년 2869만 명. 2011년 622만 명에서 무려 5배에 가깝게 늘었다. 2012년 말 재집권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관광 진흥을 아베노믹스의 간판 사업으로 내걸고 필사적으로 덤벼든 결과다.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2020년의 유치 목표는 4000만 명이다.

휴일 긴자거리 인파 절반이 외국인

머릿수에만 초점을 맞췄던 아베식 관광 입국 정책이 요즘 제대로 부메랑을 맞고 있다. 관광객들로 인한 일본 국민의 생활 스트레스가 일상화되면서 ‘관광 공해’라는 말은 일반명사가 됐다.

한 해에 외국인 관광객 700만 명이 몰리는 유서 깊은 교토, 전 세계 도시 중 관광객 숫자가 가장 빠르게 불어난다는 오사카(大阪), 여기에 고베(神戶)와 나라(奈良)까지 몰려 있는 간사이 지방을 필두로 홋카이도(北海道)와 간토(關東) 지방 등 일본 전역이 ‘관광 공해’의 사정권이다.

주민들의 일상이 눈에 띄게 피폐해졌다. 쓰레기가 폭증하고, 전철·지하철 안이 시끄러워지고, 평소 다니던 집 앞의 동네 식당이 관광 명소로 바뀌어 북새통이 되는 건 이미 뉴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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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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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버스와 전철은 관광객이 접수했다. ‘전체 인구는 17만, 한 해 관광객은 2000만(내국인 포함)’이라는 도쿄 인근 가마쿠라(鎌倉)시 시민들에겐 해변을 따라 운행하는 전철 에노덴(江ノ電) 타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주말이면 역 안에 들어선 뒤에도 무려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때가 많다.

관광객들로 인해 만원 버스가 일상화된 교토에선 출근시간대의 회사원들이 버스를 못 타 발을 동동거리는 일이 허다하다.

외국인들이 모는 렌터카 사고가 크게 늘면서 오키나와에선 경찰이 “한국어와 중국어를 쓰는 사람에겐 차를 빌려주지 말라”고 렌터카 업체에 요청했다가 물의를 빚었다.

관광객 버스 점령, 출근길 애 먹어

황당한 사례도 많다. 교토에선 관광객들이 레스토랑에서 식사 중인 옆 손님의 음식을 맛보고 “같은 걸로 달라”고 주문하고, 음식을 먹던 손으로 거리를 지나던 마이코의 몸과 기모노를 만지는 일도 흔하게 벌어진다고 한다.

사슴들이 많은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 앞에선 사진을 함께 찍으려 사슴들을 괴롭히다 물리는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후지산 주변은 변기에 쓰레기를 버리는 관광객들 때문에 홍역을 앓고 있다.

고급 숙박시설이나 식당들은 예약을 펑크 내는 관광객들 때문에 고민이다. 홈페이지에서 아예 외국어 소개를 빼거나 외국인들의 예약을 거절하고, 까다로운 조건에서만 예약을 받는 업소가 늘어나고 있다.

어려서부터 “남에게 메이와쿠(迷惑·폐)를 끼쳐선 안 된다”는 가르침을 심신에 체득해 온 일본인들이기에 관광 공해의 충격을 더 크게 느낀다는 분석도 있다.

교토 금각사 등 정취 감상 어려워

그런데 더 심각한 건 단지 일상생활의 불편뿐만 아니라 관광지로서의 가치까지 위협받는 사례들이다.

교토의 기요미즈데라(淸水寺·청수사)와 긴가쿠지(金閣寺·금각사) 등 유명 사찰, 가마쿠라 지역의 한적하고 일본스러운 정취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새벽 이른 시간이 아니면 관광객에 휩쓸려 제대로 감상하기조차 불가능하다.

게다가 허가제였던 민박이 신고제로 풀리는 ‘민박 해금’ 정책이 6월 중순 실시되면 “싸구려 민박집에 외국인들이 몰리면서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극에 달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일본 정부는 민박 금지 해제를 ‘외국인을 더 끌어오는 신의 한 수’라고 꼽지만 주민들에겐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관광 공해의 해법으로 거론되는 건 ‘관광객의 분산’이다.

다카사키게이자이(高崎經濟)대 이카도 다카오(井門隆夫) 교수는 최근 아사히신문 기고에서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효과적인 관광객 분산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당장 비인기 관광 지역의 인프라 정비를 위해선 천문학적 예산 지원이 절실하다.

관광 진흥과 관광 공해 사이에서 정답을 찾아야 하는 고민이 일본 사회를 당분간 괴롭힐 것 같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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