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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수)

[`新견생열전` 능청 입양견과 초보 반려인의 좌충우돌 동상이몽] 수리, 내게 엄마를 가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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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를 입양하고서 일신만 챙기며 편히 살던 시절은 내게 안녕을 고하고 총총히 멀어져 갔다. 시간과 몸을 쪼개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지만 즐거웠다. 내가 데려왔으니 책임지겠다는 각오 같은 딱딱한 마음가짐 따위는 수리를 보면 스르르 사라지고 그 자리는 행복과 충만감으로 채워졌다. 근간에 건강이 좋지 않은 엄마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더 바빠졌다. 그런데 어째선지 수리와 달리 늙고 아픈 엄마는 숙제처럼 느껴졌고, 내 속에는 묵직한 괴로움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런 내게 죽비를 내리치듯 수리가 가르치는 바가 있었으니.

시티라이프

편찮은 엄마를 ‘모신다’는 명목으로 식구가 늘면서 나는 시간과 몸을 더 잘게 쪼개야 했다. 엄마와 수리는 서로 나쁘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 생활을 시작한 엄마에게 수리는 친구가 되어 주었고, 수리 역시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이 줄었으니. 내게만 분신술이 필요할 뿐이었다. 늘 서둘러야 했고 집중력이 흩어져 깜빡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자괴감과 한탄이 늘어 가는 중에 나를 가장 혼돈스럽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수리로 인한 수고로움은 힘들게 여겨지지도 않거니와 화가 났다가도 금방 맥없이 누그러지는데, 어째서 엄마한테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엄마 건강이 시원치 않다는 걸 모르는 바도 아닌데 엄마가 이런 건 좀 알아서 해줬으면, 저런 건 좀 안 해줬으면 하는 게 자꾸 눈에 들어왔고, 몇 번 참다가는 결국 짜증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면 어김없이 회의가 밀려들었다. 왜 수리를 대할 때처럼 가볍고 즐거운 마음이 ‘내 엄마’한테는 안 되는 걸까 하고.

▶수리와의 시간, 엄마와의 시간

다행스럽게도 이런 내가 부정적 감정에 브레이크를 걸고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이 있다. 수리한테 무심코 내뱉는 말 중에 어릴 적 엄마에게 들었던 말들, 수리한테 들이는 수고로움 중 여태 엄마가 자식들에게 해준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그렇다. 가령 이런 거다. 목욕을 싫어하는 수리를 어르다 지쳐 “가만히 있기만 하면 씻겨 줘 말려 줘 끝나고 간식까지 주는데, 도대체 넌 뭐가 힘들다고 이 난리야!” 하고 짜증을 퍼붓다가, 퍼뜩 회상한다. 어릴 적 목욕탕에 가면 연년생인 언니를 씻기고 나를 씻기고 동네 할머니 등까지 밀어주고 나서야 후다닥 몸을 씻던 엄마를. 집에 오면 앉을 틈도 없이 곧장 맛국물을 내 우동을 넣고 훌훌 끓여 다섯 식구 점심상을 차리던 엄마를. 그리고 그런 엄마한테 우동은 지겹다고, 짜장면 좀 사 먹자고 투정 부리던 나를.

한밤중에 수리가 빈 물그릇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비몽사몽 중 일어나 물을 채우다가 또 문득 생각한다.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의 컴컴한 새벽녘, 방 세 군데 연탄불을 가느라 마당을 가로질러 왔다 갔다 하는 엄마의 슬리퍼 소리를. ‘엄마는 무섭지도 않나’ 하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잡아당기며 다시 잠을 청했던 나를.

수리 대변을 치울 때 골똘히 들여다보며 굳기와 성분, 냄새를 살펴 아픈 데는 없는지 체크하다가 또 불현듯 떠올린다. 수년 전 허리를 다쳐 한 달 반을 꼬박 누운 채로 지내야 했던 엄마의 기저귀를 갈 때마다 숨을 꾹 참고 후다닥 해치우기 바빴던 나를.

그랬다. 엄마는 내게 ‘주는 존재’였다. 아주 오랫동안 엄마는 내게 밥을 주고 응석을 받아 주고 나의 안녕을 빌어 주었다. 지금은 늙고 아픈 엄마가 돼 버려 줄 것이 마음밖에 안 남았지만, 철이 덜 든 나는 엄마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여전히 많은 걸 받기만 바라고 있는 거다. 수리와 함께하며 순간순간 소환되는 엄마의 과거에 나는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는다. 의도치 않게 ‘죽비부인’이 된 수리로 인해 나는 엄마를 제대로 보고, 자식으로 갖는 터무니없이 끝 없는 기대를 하나씩 내려놓자고 결심한다. 물론 아직은 멀고 멀었다. 엄마 마음을 안다는 건. 그건 아마 수리와 시간을 함께하면서 더 깊이 그리고 더 진하게 깨달아 가기도 할 테지.

[글과 사진 이경혜(프리랜서, 수리 맘)]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26호 (18.05.01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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