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눈길 주는 이 없었다. 모든 꽃들이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을 때에도 너는 세상에 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연둣빛 잎 사이로 작은 얼굴을 내밀었으니 너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나 역시 너의 존재를 모르고 살았다네.
어젯밤 퇴근길, 너는 내 앞에 확연히 나타났네. 봄비가 내리고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었지. 너는 낙화가 되어 일제히 쏟아져 내렸지. 검은 아스팔트가 너의 연노란 꽃들로 덮였지. 재잘대던 참새들이 숨을 죽이고 가로등 불빛이 너의 육신을 조용히 비쳐주고 있었지.
혹서의 계절이 지나면 너는 노란 은행으로 부활할 테지. 사람들은 네 육신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수군거리겠지.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해주겠네. 한 평생 냄새 나는 육신을 부둥켜안고 사는 너의 처지를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고.
인간은 종종 누구를 이해한다고 말하지. 그러나 단순히 남의 사정을 헤아리는 것만으론 진정한 이해에 이르지 못하네. 내가 상대의 처지가 될 때 비로소 이해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지. 그러니 인간은 너를 절대 이해할 수가 없네. 너처럼 은행이 될 수 없으니까.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인간이 남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한 일일 테지.
어쩌면 우리는 이해라는 말을 너무 자주 사용하고 있는지 모르네. 남편은 아내가 될 수 없고, 내가 친구가 될 수 없는데도 말이네. 내가 상대를 이해한다는 교만은 갈등과 원망을 낳는 주범이지. 차라리 이해의 결핍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비책이 아니겠나.
배연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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