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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드루킹 사건’과 노엘레노이만 ‘침묵의 나선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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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부하 여직원과의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 처한 미국 대통령을 구하기 위한 비밀 작전이 전개됩니다. 백악관 참모들은 극비리에 할리우드 최고 연출가를 섭외해 핵 가방을 들고 국경을 침투하는 알바니아와 미국 특공대의 전투 장면을 연출합니다. TV를 통해 미국 전역에 중계되고 국민들의 관심은 온통 그쪽에 집중됩니다. 그러는 사이 대통령의 스캔들은 관심에서 멀어집니다. 이 모든 것들은 스튜디오에서 조작된 화면이었습니다.

‘왝더독(Wag the Dog·1997년)’이라는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개를 흔든다는 의미를 가진 ‘왝더독’은 대중 매체(꼬리)에 의해 대중(몸통)이 조작당하는 현실을 꼬집은 영화입니다.

이처럼 특정 목적을 가지고 여론을 조작하고자 하는 시도는 예로부터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여론 조작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난주 가장 뜨거운 이슈는 ‘드루킹 사건’이었습니다. 드루킹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자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뉴스 댓글을 조작해 여론에 영향을 미친 사건입니다. 수백 개의 타인 아이디를 도용하여 ‘매크로’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공감’ 수를 빠르게 늘리는 방식으로 여론을 조작한 겁니다. 댓글의 공감 또는 비공감 수를 조작하는 것이 어떻게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독일 출신 언론학자 엘리자베트 노엘레노이만(1916∼2010·사진)의 ‘침묵의 나선 이론’(1974년)으로부터 가설 수준의 단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찬반이 갈리는 특정 주제에 대해 자신의 입장이 다수 의견과 같으면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만 소수 의견일 경우는 침묵한다는 이론입니다. 대중이 침묵하는 이유는 고립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노엘레노이만은 주장합니다. 노엘레노이만의 이론이 타당하다고 한다면 특정 뉴스에 대해 공감 또는 비공감을 선점하는 것으로 여론 향방을 바꾸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민주정치는 곧 여론정치입니다. 여론 조작은 민주주의를 좀먹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드루킹 사건의 핵심인 여론 조작 행위를 직접 처벌하기는 어렵습니다. 법이 미비하기 때문입니다. 형법상 업무방해죄를 적용하여 처벌 근거를 찾을 수는 있으나, 여론 조작 행위 자체를 범죄 구성 요건으로 하는 법 규정은 없습니다.

컴퓨터 등 물질문화는 빠르게 발전하는 데 비해 그를 뒷받침할 제도나 사람들의 의식은 뒤처지는 현상을 이미 통찰한 학자가 있습니다. ‘문화 지체(cultural lag)’라는 개념으로 설명한 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필딩 오그번(1886∼1959)입니다. 지난주 국회에서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일명 ‘드루킹 방지법’)이 발의됐습니다. 누구든지 대여·도용한 타인의 개인정보를 이용하여 여론 조작 등 부정한 목적으로 게시판에 댓글 등 정보를 게재·입력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입니다. 적절한 제도가 마련되고 의식이 뒤따른다면 물질문화의 급격한 발전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박인호 용인한국외국어대부설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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