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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시선 2035] 나는 당하고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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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윤정민 산업부 기자


“절대 성공하지 말자.” 친구가 말했다. “그래, 우린 성공하면 안 돼.” 맞장구쳤다. 미투(#MeToo)부터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를 거쳐 다산신도시까지 이어진, ‘갑질’을 화제 삼아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뭐 가진 게 없어서 딱히 괴롭힐 사람도 없었지… 아마 우리가 회장 아들이었으면 더했을 걸.” 다른 친구가 덧붙였다.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한동안 누구를 만나면 미투나 대한항공을 입에 올렸다. 대부분은 ‘갑’을 욕하는 것으로 대화가 끝났다. 그때마다 나는 자주 움찔했다. 내 말을 듣던 누군가 ‘넌 안 그랬냐’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나는 항상 당하고만 살았을까. 사실을 말하자면, 난 꽤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회사에서 나는 아직 ‘을’이나 ‘병’도 못 된다. 굳이 말하자면 ‘정’이랄까. 그런데 내게도 몇몇 후배가 생겼다. 내가 정이니까, ‘정 중에서도 정’ 정도일 거다. 가끔 그들과 같이 일을 한다. 그럴 때 나는 ‘정 중 정’들을 종종 무섭게 질책한 적이 있다. 심한 말을 한 적도 없지 않다. 밤늦게 한잔하자고 후배를 불러낸 적도 두어 번 있다. 나름 정당하다고 믿었기에 한 지적이었고 친하다고 생각해 불러냈지만 아마 그들의 입장은 달랐을 것이다. 어쩌면 난 티끌만 한 권력을 손에 쥐고선 태산을 등에 업은 것처럼 그들을 대했을지 모른다.

학교도 사회만큼 힘의 우열이 뚜렷하다. 난 싸움을 잘하는 친구의 비위를 맞췄고, 나보다 약해 보이는 친구는 종종 괴롭혔다. 또한 내세울 얼굴도 아니면서 남들 ‘얼평(얼굴평가)’는 참 많이도 했다. 이성이 지나가면 함께 걷던 친구에게 “방금 봤냐? 죽인다” 따위의 말도 수없이 했다. 생각나지 않는 잘못도 서울의 미세먼지보다 많을 것이다. 다행이라면, 미세먼지만큼 치명적인 해악을 끼치진 않았다는 것 정도다.

물론 갑질을 마주하면 우리는 용기 내서 비판해야 한다. 비판할 자격도 충분하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후배에게 물을 뿌리지 않았고, 화가 난다고 비행기를 되돌린 적도 없으며, 이성을 희롱하거나 추행하지도 않았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런 식의 행패를 부리지 않고도 잘 산다.

그런데도 께름칙한 기분을 완전히 떨칠 순 없다.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는 말을 엄격하게 따르자면, 별로 할 말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항상 당하고 억눌렸던 사람에게 작은 권력을 주면 더 혹독하게 약자들을 괴롭히고 억누르기도 하더라, 그런 사람을 수없이 봐왔다”고. ‘물벼락 갑질’ 사건을 계기로 스스로를 되돌아보자는 얘기다. 나는 예외일까. 우리는 혹시, 누군가의 갑이지 않았을까.

윤정민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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