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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 (금)

[문소영의 컬처 스토리]‘불쌍한 엄마’ 되길 거부한 미술거장 이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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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사실 아버지는 이혼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시대엔 남자 외도를 아내가 그냥 참아야 하는 분위기였고, 아버지가 우리들(세 아들)까지 뺏어왔으니까, 어머니가 자식들 보고 싶어서 굽히고 들어올 줄 아셨던 게지. 그런데 어머니는 그러기는커녕 프랑스로 떠나신 거예요. 아버지는 충격 받으셨지.”

이성자(1918-2009) 화백의 막내아들인 신용극 유로통상 회장이 들려준 이야기다. 예전에 나는 이 화백이 51년 파리로 떠난 게, 외도한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이혼당해서’라고 잘못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시작한 이성자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스케일 큰 추상화들, 삶의 흔적이 담긴 자료들에는 그런 스토리에 어울릴 법한 처연함 대신 호방한 기개가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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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의 ‘여성과 대지’ 연작 중 하나인 ‘내가 아는 어머니’ (1962), 캔버스에 유채, 130x195cm. [사진 제공=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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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를 프랑스 화단에서 처음 인정받게 한 ‘여성과 대지’ 연작도 그렇다. 모국과 아이들을 생각하며 “땅을 깊이 가꾸듯” 그렸다는 두터운 질감의 추상화들이다. 거기엔 분명 그리움의 서정이 느껴지지만, 비애감보다는 대지를 경작하고 굽어보는 자의 넉넉함이 있었다.

또한 ‘도시,’ ‘음과 양’ 등의 연작에서는 동아시아 상형문자에 바탕을 두고 이성자가 창조한 추상 기호들이, 마천루에서 내려다본 기하학적 도시풍경, 또는 나무들과 결합되어 있었다. 작가의 말대로 음과 양, 동양과 서양, 자연과 기계의 합일을 추구하는 작품이었고, 동아시아 여성인 자신이야말로 그 균형 잡힌 합일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절망에 빠져 떠밀리듯 프랑스로 간 ‘비운의 여인’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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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의 ‘도시’ 및 ‘음과 양’ 연작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걸려 있는 모습. [사진 제공=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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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성자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는 신 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들과의 생이별에 이 화백 자신의 선택도 일부 있었다. 오로지 자식을 위해 남편의 외도 등 모든 것을 참아 넘기며 이름 없이 ‘누구 어머니’라고 불리며 사는 대신, 홀로 서서 ‘이성자’라는 이름으로 사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이름에는 제1세대 한국 추상미술의 주요 화가, 한국 최초의 성공적인 해외파 작가, “한국과 프랑스 모두에게 현대 미술사의 중요한 증거”(미술사학자 강영주, 정영목), “한국과 프랑스의 풍경과 전설이 서로 대화하도록 해준 동녘의 대사(大使)”(소설가 미셸 뷔토르) 등의 칭호가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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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 추상화 장애없는 세계(1968)와 1963년의 이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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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들들은 어머니의 그 선택에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65년 이 화백이 금의환향해 서울대학교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15년 만에 성장한 아들들과 재회했을 때, 아들들은 어머니가 미안해하길 내심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화백은 아들들에게 당당했다.

“그땐 이해가 안 갔는데 더 나이 먹고 어머니 계신 프랑스를 드나들며 마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어머니의 그런 의연한 태도, 또 예술과 삶에 대한 치열함이 저희 3형제에게 영감을 주어서 저희가 강하게 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신 회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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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의 ‘초월 12월 1, 75’(1975), 캔버스에 아크릴릭, 나무, 160x130cm. 사진=문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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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는 불어도 잘 못하고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30대 중반에 파리에서 처음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 하는 일인 의상 디자인을 정식으로 배워 (그는 아들들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곤 했다.) 한국에 와서 의상실을 열 생각이었었다. 하지만 그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본 교수의 권유로 파리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 입학해 회화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좁아터진 다락방에 살며 뼈를 깎는 노력을 한 끝에 불과 3년여 만에 성공적인 화단 데뷔를 하게 됐다. 신 회장의 말대로 “타고난 재주와 절박함이 만난 결과”였다.

그 후 이성자는 ‘여성과 대지’ 연작으로 프랑스 화단의 인정을 받고, 샤르팡티에 같이 당대에 유명한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성공한 연작에 안주하지 않고 5~10년마다 새로운 주제와 화풍과 재료로 새로운 연작을 실험하며 정진해갔다. 회화뿐만 아니라 목판화와 도예도 깊게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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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의 판화 목판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전시된 모습 (사진: 문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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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인 92년에는 프랑스 남부 투레트에 많은 미술가들의 로망대로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스튜디오를 짓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음과 양의 모티프를 딴 두 동의 건물이다. 그곳에서 ‘양의 시간’인 낮에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올리는 ‘양의 작업’ 회화를 하고 ‘음의 시간’인 밤에는 목판을 파는 ‘음의 작업’ 판화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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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자의 ‘투레트의 밤 8월 2, 79’(1979), 캔버스에 아크릴릭, 150x150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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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치열하게 작업하셨습니다. 한국에 오실 때는 도예 작업에 집중하곤 했죠. 한번은 프랑스에서 어머니와 위스키를 마시며 (어머니가 위스키를 좋아하셨어요.)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머니께 여쭤봤습니다. 다른 많은 화가들은 어떤 작품이 성공하면 계속 그 스타일로 밀고 나가던데, 어머니는 왜 계속 바꾸시느냐고, 왜 편한 길을 가시지 않느냐고. 어머니가 그러셨죠. ‘편한 게 뭐냐. 예술가는 멈추면 안 된다. 내 그림이 50년 후, 100년 후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면서 계속 새로운 걸 실험해야 한다.’ ”

그런 그를 신회장은 “존경하는 예술가이자 한 인간이자 어머니”라고 했다. ‘희생하며 산 불쌍한 엄마’ 대신 이성자는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삶이 그의 말대로 50년 후, 100년 후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다. ‘엄마는 희생하는 존재’라는 관습적 사고에 눌려 죄책감에 시달리는 워킹맘들에게, 또 새로운 도전을 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이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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