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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 (월)

[유인경의 내맘대로 본다]본데 없는 재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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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본데 있다.”

대한항공 조현민 물컵 사건을 보며 이 말이 떠올랐다.

본데 있다는 사전적 의미로는 ‘보고 배운 바가 있다. 또는, 예의범절을 차릴 줄 안다.’란 뜻이다. 영어로는 have good manners , be experienced , be well-bred. 동서양을 막론하고 ‘잘 보고 배워 예의를 차린다’라는 말이다.

대한항공 직원이나 조씨 일가에서는 확인해주지 않고 있지만 조현민과 그의 어머니 이명희씨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욕설과 고성 음석파일리 뉴스로 공개되면서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침없이 이어지는 상스런 욕설과 그악스러운 고성 등이 재벌가 사람은 커녕 골목에서 멱살 드잡이를 하는 이들에게서도 듣지 못한 천박한 언행이어서다.

심리기획자이자 치유공간 이웃을 운영하는 이명수씨는 최근 자신의 SNS를 통해 “조현민이란 자가 사무실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로 발광하는 음성파일을 들으면서 착잡하고 끔찍했다”며 “저렇게 소리지르다 제풀에 죽겠다며 분노조절장애 같다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는데, 분노조절장애는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또 “최순실이 비선실세일 때 있었던 그의 갑질들은 분노조절장애라고 진단 붙여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상황이면 누구라도 분노조절장애자가 된다. 그 이유는 분노를 조절 못해서가 아니라, 조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그렇다”고 분석했다.

대한항공 오너의 부인이자 전 차관의 딸인 이명희씨나 재벌 3세인 조현아·현민 자매는 자신의 성질이나 분노를 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것 같다. 소리를 지르고 함부로 욕을 해도 항의는 커녕 꼼짝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갑질의 쾌감만 키우다가 결국 전국민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됐다. 자선바자 등 공식석상에서 우아한 미소를 짓던 재벌가 모녀가 자신이 돈을 주거나 고용한 이들에게 보이는 모습을 보면 그것이 ‘가족력’, 즉 보고 배운 것이 화내고 욕하고 소리지르는 것 뿐임을 알겠다. 경제적으론 금수저를 물려주었지만 정서적으로는 흙수저도 못물려준 것 같다. 그러니 땅콩회항이란 신조어를 만들며 감옥까지 갔다온 언니를 보고도 컵을 던지고 표효하는 소리를 질렀을게다.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이므로.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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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분노를 조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특권일까. 그들에게 잠시의 우월감을 줄지는 모르지만 결국 자신의 인격을 저급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이들을 사라지게 만드는게 아닐까.

류시화씨의 산문집 <새는 말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는 한 스승이 제자에게 사람들이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서로의 가슴이 멀어졌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 거리만큼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중략)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면 두 사람의 가슴은 아주 멀어져서 죽은 가슴이 된다. 죽은 가슴에겐 아무리 소리쳐도 전달되지 않는다.”

거래처건 직원이건 그들 모녀의 고성과 욕에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그들에게 따뜻하고 생생한 가슴을 전하는 이들은 없을게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안쓰러워서 고개를 피했을게다. 월급이건 계약금이건 돈을 주는 이들에게 갑질을 해도 된다면 항공료를 낸 승객들은 대한항공 가족에게 그들의 갑질을 되돌려줘도 될까.

비단 재벌가만의 일은 아니다. 어느 중년 여성은 “우리 어머니가 평소 울화가 많아서 쌍욕을 자주 하셨는데 치매환자가 된 후엔 조절이 안되시니 하루 종일 욕을 입에 달고 사시는데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부끄럽다”면서 “혹시 나도 치매에 걸릴 때를 대비해서 일상생활에서 고운 말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게 내 자신이나 자식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고 말했다.

회사나 돈은 안 물려주셨지만 우체부 아저씨에게도 항상 “더운데 수고하십니다. 찬 물이라도 드릴까요?”라고 하시던 우리 어머니가 새삼 그립고 감사하다. 적어도 내 인생을 저속한 욕으로 물들이게 키우시진 않으셨으니 말이다.

<유인경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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