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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금)

北 곳곳에 스며든 시장경제…新남북경협은 기업이 주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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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경제공동체 만들자 ①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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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의주에 사는 리한길 씨는 장마당에 갈 때마다 화장품, 빵, 신발을 주로 구입한다. 전부 북한산이다.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질 때문이다. 4~5년 전만 해도 중국산 빵이 장마당을 채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북한 주민은 맛 좋고 포장도 예쁜 북한 빵을 선호한다. 신발도 중국산은 '한주일 신(일주일 신으면 망가지는 신발)'이라 조롱하며 쳐다보지 않는다. 장마당에서 파는 옷은 중국산이 많지만 백화점에는 디자인이 세련된 북한산 여성복이 즐비하다. 평양방직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 종류는 270여 가지에 달한다.

#2 최근 북·중 접경 지역을 찾은 국내 한 북한 전문가는 '제재 때문에 대중 무역의존도가 높아진 북한이 무연탄을 호주산 절반 가격에 팔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중국이 북한에 갑질을 하거나, 순진한 북한 무역상이 중국에 속고 있는 줄 알았다. 실상은 달랐다. 중국 수입업자는 "북한 업자들이 트럭 10대 중 3대만 제대로 된 무연탄으로 채우고, 나머지는 질 떨어지는 무연탄을 섞거나 아예 빈 트럭을 보낸다"고 하소연했다. 북한 수출업자는 "중국 사람들이 우리 사정을 이용하려 하는데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평양 등 일부 대도시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집권 후 성장한 북한 경제 실제 모습이다. 북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 국가예산 규모는 74억5000만달러(북한 원 기준 8179억원)다. 이는 2010년에 비해 1.5~2배 늘어난 금액이다. 주력 산업인 농업 생산은 2010년 411만t에서 2016년 480만t으로, 무역 규모는 2010년 42억달러에서 2016년 69억달러로 증가했다.

북한 주민들 라이프스타일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2010년 43만명에 불과하던 휴대폰 가입자 수는 2016년 8배 이상 늘어난 361만명을 기록했다. 하루 세 끼 식사를 한다는 사람은 2012년 75.4%에서 86.9%로 늘었고, 거의 매일 고기를 먹는다는 사람도 같은 기간 3.2%에서 무려 22.6%로 급증했다. 특히 '비공식' 소득 규모는 훨씬 크다는 분석이 있다. 비공식 소득이란 직업이 아닌 부업으로 버는 돈을 뜻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2005년 전에는 직업 월 평균소득이 2만124원, 부업 소득은 2만6167원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2011년 이후 직업 월급은 7만6024원이었던 반면, 부업 월급은 무려 34만6417원까지 치솟았다. 가구 소득에서 부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63.5%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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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람들이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부업을 갖는 게 아니라 더 큰 비즈니스를 위한 종잣돈을 마련하거나 더 나은 삶의 질을 누리기 위해 부업을 한다는 분석도 있다. 공식 금융기관이 아닌 개별 경제주체를 중심으로 고도의 외화 통용 시스템도 구축돼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외화 시스템을 통해 조달·운영되는 외화는 정부와 국영기업 그리고 개별 경제주체로 흘러들어간다. 이처럼 북한 경제가 상전벽해(桑田碧海)를 겪었기 때문에 새롭게 재개될 남북 경협도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어야만 할 것이라고 북한 경제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새로운 남북 경협의 핵심은 '기업 주도'다. 국내 대기업 산하 연구소 소속 북한 경제 전문가는 "정부 주도만으로는 남북 경협을 이끌고 갈 자원과 재원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기업이 주도를 해야만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 남북 경협이 정부가 주도했던 초기 단계에만 머물렀던 이유는 정치와 경제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은 기업이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인프라스트럭처 건설 등 대형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대북 투자에 집중해야 한다. 대형 프로젝트에는 삼성, SK, 포스코, 두산 등 우리나라 대기업 참여를 유도하되, 이는 반드시 수익성 원칙에 입각해 기업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남북 간 경제력 차이 때문에 남한이 무역흑자를 달성하는 건 어려워도 투자 수익을 얻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법·회계·금융 등 북한 경제 관련 여러 분야에서 구조적·제도적 지원도 정부가 해결해야 할 몫이다. 더불어 남북 경협 시 북한이 어떠한 경제적 이익을 볼 수 있는지도 명확히 알려줘야 한다. 북한의 저임금 노동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북한에서 육성할 만한 차세대 산업이 무엇인지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 밖에 과거 프로젝트 중 오늘날 현실에 맞지 않는 사업은 정부가 과감히 포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2007년 10·4 선언 때 남북 정상이 의견을 모았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는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을 기억하는 국민 정서로 인해, '한강하구 공동이용'은 환경단체 반발 때문에 현실성이 낮다는 지적이 있다.

[이유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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