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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임춘택의 과학국정]<16>중복연구와 반복연구를 허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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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신문

최근 국가 연구개발(R&D) 체계 개편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지난 20여년 동안 문제가 돼 온 부처 간 칸막이식 연구 과제 관리와 이로 인한 중복 연구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이쯤 되면 왜 부처 간 중복 연구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지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중복 연구가 과연 문제인가도 알아봐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복 연구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장려돼야 할 부분도 있다. 왜 그런가.

중복 연구 문제를 언론과 정치계가 오랫동안 지적해 온 결과 지금은 여러 부처에 걸친 연구 과제는 협의를 거치지 않는 경우 상정하기 어렵게 됐다. 기획재정부와 국회 예산 심사를 통과할 수 없고, 감사원 감사와 국정감사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도가 지나치면 해롭다. 중복 연구 지적이 과도하다 보니 6만여개나 되는 국가 R&D 과제가 모두 서로 다른 과제가 됐다. 즉 조금이라도 중복됐다는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서로 공통점이 있는데도 차별화에만 집중한다. 그 결과 여러 과제를 묶어서 시너지를 내려고 해도 연구 성과가 분절화되고 서로 단절된다.

예컨대 차세대 마이크로 로봇 기술을 개발한다고 가정하자. 산업용 로봇, 의료용 로봇, 국방 로봇이 같을 수 없다. 물론 공통 기술 부분도 있지만 적용 목적이 너무 달라서 같은 주제 기술을 개발하더라도 요구되는 성능은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3D프린터도 자율주행차도 드론도 인공지능(AI)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으로 경쟁하는 연구 주제는 성공 가능성이 옅다. 한 부처보다 여러 부처가 도전하는 것이 성공 가능성 면에서 좋다. 서로 중복성이 있어야 융합과 협력도 가능해진다. 대만의 경우 연구 초기 단계에서 동일한 연구 주제를 여러 연구팀이 중복 연구하게 한다. 단계 평가를 거치면서 연구팀 수를 줄이고, 연구비 규모는 커진다. 마지막 단계에 한 팀이 선정되면 나머지 팀은 선택 받아 흡수된다. 중복 연구를 통해 경쟁과 협력을 해 나가는 구조다. 중복 연구 방지가 이념화된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구조다.

한 연구팀이 동일한 주제를 계속 연구하는 것이 반복 연구다. 일본에서는 한 연구 주제를 20년 넘게 연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노벨상에 이르게 된 비결이다. 우리는 단기 성과 위주로 가다보니 2~3년마다 계속 새 연구 과제를 기획해야 한다. 아주 많은 연구를 하는 것 같지만 정작 내실은 없었다. 중요한 연구는 10년 또는 그 이상 숙성돼야만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R&D 수준만 다르다면 반복 연구를 허용해야 한다. 연구 성과가 좋으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오도록 반복 연구를 보장해야 한다. 한 분야에서 성공한 연구 성과를 다른 분야에 적용하는 것도 장려해야 한다. 이런 확장 연구는 학제 융합의 지름길이다. 반복 연구나 중복 연구 혐의를 씌울 일이 아닌 것이다.

엄격하게 단속해야 할 것은 연구 성과 베끼기다. 자신의 것을 도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구 결과의 중복 활용과 반복 활용이 문제인 것이다. 동일한 연구 주제를 여럿이 나눠서 하든 자신이 계속하든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연구 계획보다 연구 결과를 엄격히 검증하자. 연구 계획을 차별화하려고 무의미한 계획서 작업에 많은 시간을 낭비해 온 과학기술계가 연구 결과 차별화에 시간을 쓸 수 있게 해 주자.

정부 부처 단위에서 중복 연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기초·원천 분야 R&D를 과학기술 총괄 부처에 몰아주자는 주장은 재고돼야 한다. 타 부처는 특정 산업별 수요 기반 R&D만 하라는 것이다. 참여정부 때 부총리급 과학기술부가 과기혁신본부를 두고 각 부처 연구 중복을 가려냈지만 부처별 유사 연구를 없애진 못했다. 군사 보안이 적용되는 국방 연구는 손도 못 댔고, 까다로운 규제가 적용되는 의료 연구도 통합하기 어려웠다. 일부 기초 연구는 통합 수행이 필요하지만 원천 분야 연구는 부처마다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산업·중소벤처·정보통신·국토교통·보건의료·환경·문화예술·해양수산·농림·식품의약·국방·안전·치안·교육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다. 과기혁신본부가 예산 낭비성 대형 연구 중복 과제를 조정하고, 각 부처 전문성은 살리는 방향으로 검토가 이뤄지길 바란다.

임춘택 광주과학기술원 교수 ctrim@g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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