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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마지막 불순물까지 제거한 순수함…보드카, 얼어붙은 마음을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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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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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 40도를 넘나드는 술 중에서도 가장 ‘독주’의 이미지를 강하게 품고 있는 술이 보드카다. 무색(無色)·무취(無臭)·무미(無味), 세상 어느 주류보다 알코올의 기색이 선명한 술. 보드카의 그 강렬한 이미지에는 러시아 사람들의 지분이 크다. 무엇도, 심지어 얼음조차 섞지 않은 보드카를 물처럼 마시며 가혹한 역사와 추위를 견뎌온 술꾼의 인상 말이다. 러시아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영하 40도는 추위가 아니고 보드카 4병은 술이 아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안톤 체호프는 저 무시무시한 속담보다 한 술 더 떴다. 체호프가 ‘자명종’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언론인을 위한 8단계 코스’는 다음과 같다. “1. 보드카 한 잔 2. 양배추 수프와 메밀 죽 3. 보드카 두 잔 4. 양고추냉이를 곁들인 어린 돼지고기 요리 5. 보드카 세 잔 6. 양고추냉이·고춧가루·간장 7. 보드카 네 잔 8. 맥주 일곱 병.” 차르부터 농노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술가들부터 시베리아의 죄수들까지,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보드카를 사랑했다. 구소련 정부가 보드카 배급제나 금주령 등을 시도해본 적도 있지만, 어떤 정책도 사람들의 손에서 술병을 뺏어갈 수 없었다. 공산정권으로부터 도망친 망명객들은 전 세계에 보드카를 전파했다.

러시아가 보드카의 종주국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은 절반만 맞는 얘기다.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15세기부터 동유럽 일대에서 ‘곡물로 만드는 도수 높은 증류주’가 생산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보드카의 탄생지로 추정되는 곳은 러시아와 폴란드다. 1405년 폴란드의 어느 지역 법원에서 곡물 증류주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기록되었고, 1450년 모스크바의 추도프 수도원에서 보드카와 흡사한 증류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러시아와 폴란드가 경쟁적으로 내세운 초창기 기록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보드카의 핵심은 ‘증류’에 있다. 증류는 물질마다 끓는점이 다르다는 성질을 이용해 여러 혼합물을 분리해내는 과정을 이른다. 증류가 발명된 곳은 양조장이 아니었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만물에 내재된 정령(Spirit)을 찾기 위해 여러 도구와 화학적 실험을 동원했다. 그러나 증류법은 사물의 영혼 대신 독하고 맛있는 술들을 제련해냈다. 와인으로부터 코냑이, 시큼한 맥주에서 향기로운 위스키가 태어났다. 서양에서는 여전히 이런 독주들을 ‘스피릿’이라 부른다. 수많은 스피릿들 가운데 증류 과정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술이 보드카다.

요즘은 과일향 등을 더한 플레이버드 보드카도 큰 인기를 누리지만, 모든 보드카의 제조법은 본질적으로 같다. 알코올 함량 95%의 원주가 증류기에서 추출되면, 물을 섞어 도수를 절반쯤 낮춘 후 자작나무 숯으로 냄새와 색을 여과하는 것. 오래전 연금술사들의 야심이 그랬듯, 보드카의 제조 과정에는 마지막 불순물까지 모조리 제거해 순수한 알코올만을 남기려는 의지가 흐른다.

‘가장 순수한 증류주’의 특성상, 보드카의 원료들은 큰 차이를 낳지 않는다. 무엇으로든 보드카를 만들 수 있다. 감자, 호밀, 밀 등의 전통적 재료들은 물론, 2000년대 말부터 제조되기 시작한 시락(Ciroc)은 프랑스산 포도로 만드는 보드카다. 심지어 영국의 도싯 지역에는 치즈로 만드는 보드카도 있다. 응고된 우유를 분리한 후 남은 액체, 즉 유장을 사용해 만드는 블랙 카우 퓨어 밀크 보드카에서는 ‘크리미(creamy)하고 달콤한’ 맛이 난다고 한다. 증류와 여과로 완성된 ‘무미·무취’의 술이라 해도, 재료의 성질과 증류의 정도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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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가 높은 한편 다른 술이나 재료의 풍미를 해치지 않는 특성 때문에 칵테일의 재료로도 무척 인기 높았던 술이지만, 난폭한 알코올 너머 깊숙하게 도사린 향과 맛을 느끼려면 아무것도 섞지 않은 보드카를 그 자체로 음미하며 마셔봐야 한다. 러시아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해왔던 방식 그대로. 질 좋은 보드카를 한 병 산 후 냉동실에 넣어둔다. 충분히 차가워진 보드카는 스트레이트로, 한 번에 삼킨 후 알코올 향 가득한 날숨은 길게 내뱉을 것. 치밀어 오르는 취기와 함께, 마음속 얼어붙어 있던 무엇인가가 기분 좋게 흐트러진다.

<정미환 | 오디너리매거진 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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