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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미국의 악마`란 오해샀지만…美경제패권 초석다진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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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미국 10달러 지폐의 주인공, 알렉산더 해밀턴(1755~1804년)은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해밀턴은 조지 워싱턴이나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다른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그림자에 가려 있었다. 2004년 출간된 이 전기는 근현대사 최고의 재무장관이자 미국의 설계자로 불리는 해밀턴의 위치를 복권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JP 모건과 록펠러의 전기를 쓴 비즈니스 전기작가 론 처노는 2만2000쪽에 달하는 편지, 일기 등 고증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삶을 복원했다. 1428쪽 두께에 2㎏이 넘는 역작이다.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 가장 극적이고 별난 인생을 산 것으로 평가받는 해밀턴의 삶은 숱한 오해로 가득했다. 오늘날까지도 '제퍼슨 민주주의'에 대립되는 말로 '해밀턴 귀족주의'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 농업 중심 사회를 옹호했던 제퍼슨은 해밀턴을 미국의 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의 악마)로 모략했다. 은행과 공장, 증권거래소와 같은 악마적 술수를 옹호하는 자로 여겼던 것이다. 강력한 연방주의, 즉 여러 주가 강력한 중앙정부에 종속된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행정부를 따른다는 해밀턴의 사상은 당대에 미국이 자칫 영국 왕실이 보여줬던 방식으로 회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해밀턴은 사상가이자 동시에 집행자였다. 미국 초대 재무장관이자 설계자로서 그는 헌법적 원칙을 받들었고 추상적 관념을 제도적 현실로 바꿔놓았다. 예산제도, 장기채, 조세제도, 중앙은행, 세관체제, 연안경비대를 포함해 근대 국민국가라는 조직을 용케도 부드럽게 운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저자는 "제퍼슨이 미국 정치 담론의 정수가 될 만한 시를 썼다면, 해밀턴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경영에 대한 산문을 쓴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그 어떤 건국의 아버지들도 장래 미국의 정치·경제·군사적 국력에 대한 명확한 전망을 내놓지 못했고, 국가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기발한 메커니즘 역시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간략하게 훑어보자. 그는 노예무역이 이뤄지던 카리브해 베니스 섬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해밀턴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불안정한 서인도제도 중산층의 삶을 살았다. 위로는 플랜테이션 귀족에게 치이고, 아래로는 거리의 폭도나 노예에게 시달리는 삶. 이런 유년기는 그를 노예제 폐지론자가 되게 만들었다. 노예의 반란을 두려워하며 사는 겁 많은 농장주들을 보며 자란 그는 미국 대륙으로 건너간 후에도 무정부 상태에 대한 큰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이로 인해 폭정과 무정부라는 두 개의 망령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해밀턴은 궁핍했던 어린 시절을 보상받으려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독립전쟁에 참전해 워싱턴의 최측근 참모로 활약한 후 변호사가 됐고 정계에 진출했다. 킹스칼리지(컬럼비아대)를 중퇴하고 전쟁에 뛰어든 그는 전형적인 뉴요커였다. 초대 재무장관이 된 뒤 가장 큰 전투는 수도 이전을 둘러싼 갈등. 뉴욕을 수도로 만들겠다는 해밀턴의 열망은 강했지만, 제퍼슨과 워싱턴은 포토맥이 영구 수도가 되기를 원했다. 제퍼슨은 이를 통해 '마구잡이로 자라난 상업도시'의 유혹으로부터 안전한 전원 풍경에 수도를 심을 수 있으리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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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초대 재무장관이자 오늘날 경제 체계의 초석을 다졌다. 사진은 토니상 11관왕에 빛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해밀턴`의 한 장면. [사진 제공 = 뮤지컬 해밀턴 공식 홈페이지]


연방정부의 주 채무 인수와 뉴욕의 수도 선정이라는 두 정책 중 해밀턴은 전자를 더 소중히 여겼다. 해밀턴은 수도를 포기하는 대가로 남부의 지지를 얻는 방법을 고려했다. 1790년 6월 20일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만찬에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 해밀턴은 마주 앉았다. 해밀턴은 포토맥을 수도로, 필라델피아를 10년간 임시 수도로 하는 타협안을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미국 연방 정부는 강력한 힘을 얻게 됐다.

독립전쟁의 소란 속에서 금융의 역사를 독학으로 공부한 그는 곧이어 중앙은행 설립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모든 주에서 통용되는 단일 통화가 없고 외환이 난장판으로 뒤섞인 상황이었다. 해밀턴은 국가에는 통화 공급을 확장시키고, 정부와 기업의 신용을 늘리며, 세금을 징수하고, 부채를 갚고, 정부 기금의 보관소가 되어줄 기관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제퍼슨은 은행을 가난한 이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농부를 억압하는 장치로 여기며 극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1791년 1월 20일 미합중국은행 설립 헌장은 상원을 통과했고, 2월 20일 하원도 통과했다. 미국이 노예를 부리는 남부 대지주의 나라에서 상업의 나라로 변신하게 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1791년 7월 4일 해밀턴의 중앙은행에 대한 주식 청약이 이뤄졌다. 기대감에 부푼 대중은 너나없이 청약에 뛰어들었고, 1시간 만에 주식은 동났다. 해밀턴은 이렇게 떠들썩한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사 최초의 떠들썩한 불륜 스캔들을 비롯해 정적들과의 지독한 갈등 등 파란만장한 삶을 소개한 뒤 책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그의 삶은 49세 나이로 미국 부통령 에런 버와의 결투 끝에 허드슨 강변 절벽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막을 내린다.

출간 10여 년이 지난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부활한 건 브로드웨이 최고 인기 뮤지컬 '해밀턴'의 영감이 된 책으로 알려지면서다.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반감과 맞물려 미국에는 한동안 '해밀턴 열풍'이 불었다.

"오늘날 우리가 해밀턴의 미국을 이어받은 상속자라는 데는 반박의 여지가 없고, 그의 유산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현대 세계를 거부한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저자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보다 해밀턴이 더 크고 지속적으로 미국사에 영향을 끼쳤음을 짚어준다. 허허벌판이던 뉴욕을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만든 공을 높이 산 것이다. 해밀턴은 무엇보다 미국이 세계적인 경제 선도국으로 갈 수 있는 초석을 닦아 놓은 인물이다. 경제사령탑을 정권의 마름 정도로 취급할 뿐인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안겨주는 책이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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