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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허연의 책과 지성] 크리스토퍼 메릴 (19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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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르포 작가로 발칸전쟁을 직접 목격한 미국의 시인이자 논픽션 작가 크리스토퍼 메릴은 큰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 앞에서 그는 무기력에 빠진다.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게다가 가정불화까지 겹쳐 이혼을 하게 된 그는 영적 순례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경건한 땅을 찾아 자신의 영혼을 정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고민 끝에 정한 목적지는 아토스반도다.

그리스 북부에 있는 아토스는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수도원 자치공화국이다. 아토스는 그리스 보호령이기는 하지만 그리스 정부와는 별개의 사법과 입법 체계를 가지고 있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정식 명칭은 아토스 성산 자치국(Autonomous Monastic State of the Holy Mountain)이다.

아토스는 국가 전체가 동방정교 수도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별도 입국 비자가 있어야 한다. 입국은 무척 까다롭다. 매일매일 극히 소수의 정해진 방문자에게만 비자를 발급하기 때문에 입국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다.

예수가 황야에서 40일을 보낸 후 사탄에게 끌려와 자신에게 무릎을 꿇으면 "세상의 모든 나라"를 주겠다는 유혹을 받았던 곳이 바로 아토스 산이다. 지금 그 땅은 2000m가 넘는 영봉 아래 유혹 자체가 존재할 수 없는 무균지대로 남아 있다. 1988년 유네스코가 이 일대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면서 고립무원의 성지는 굳건히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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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스는 여성의 출입이 무조건 금지된다. 심지어 동물도 암컷은 입국할 수 없다. 아토스 안에서는 노래를 부르거나 물속에 들어가거나 육식을 하거나 허락 없이 사진을 찍거나 하는 행위도 모두 금지다. 오로지 신만을 경배하는 땅인 셈이다.

아토스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가 메릴에게 물었다.

"아토스산에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데."

"그냥 걷고 기도하려고."

그는 그렇게 아토스를 걸었고 그 경험담을 '숨은 신을 찾아서'라는 책에 담았다.

아무도 배부르게 먹지 않는 곳, 편한 침대도, 아름다운 여인도, 재화를 얻기 위한 경쟁도 없는 땅. 유희라는 이름의 모든 것과 담을 쌓고 수백 년 된 어두컴컴한 수도원에서 평생을 기도로 보내는 수행자들을 바라보며 메릴은 고뇌에 빠진다. 그리고 깨닫는다. 세상에는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음을.

"나는 시와 영적인 문제를 논할 때는 신비를 찬양했으면서도 부부 싸움을 하면서는 논리만을 따지려 했다. 나는 그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을 뿐이다. 논리라는 암초에 부딪혀 우리의 결혼은 침몰에 이르렀다."

아토스에서 메릴은 시가 그러하고 믿음이 그러하듯, 사랑도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계산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는 것들만 가지고는 어떤 갈등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결국 메릴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현대적 인식에 의문 부호를 던진다.

"삶은 보이지 않는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보이는 것은 잠시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토스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곳에 가보고 싶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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