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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남이 싫어하는 여자’가 혐오시대를 건너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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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혐오, 문명, 정치, 결혼과 가족…
9가지 질문으로 여성사 재구성
“성전쟁 시대 20대에게 도움되길”


한겨레

이임하의 여성사 특강
-10대를 위한 인문학 특강 시리즈 3
이임하 지음/철수와영희·1만3000원


“얻어 입고 얻어먹고 놀기만 좋아하며” “허영에” “사치덩어리” “누워서 먹고만 살려 하며” “덮어놓고 이름난 사람이면 시집가려고만 하고” “남자가 사 보내는 것을 기뻐하며”…. (1924년 8월호 <신여성>) 일제강점기 신여성에 대한 사회적 비난은 개똥녀(2005), 된장녀(2006), 신상녀(2008), 김치녀(2010) 등 각종 ‘○○녀’ 시리즈로 양산돼온 오늘날 여성 비하·조롱의 표현과도 다르지 않다. 1920년대 등장한 ‘신여성’ 담론을 오늘날 여성 혐오 표현의 출발로 본다면, 그 역사는 줄잡아 100년 가까이 된다. 이광수는 1932년 월간지 <만국부인>에 실은 ‘신여성의 십계명’을 통해 여성에게 순결, 자애, 유쾌, 겸손을 강조하고 분노, 질책, 질투, 분쟁을 멀리하라고 일렀다. 한국 전쟁 뒤 여성의 성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반영한 듯 “한국의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꽃을 찾을 수는 있어도 처녀는 찾아볼 수 없다”는 말이 유행했다. 법원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박인수 사건)하는 판결을 내렸고 정조관념이 희박한 여성을 일컫는 ‘양갈보’ ‘아프레걸’(전후파 여성을 가리키는 프랑스어에서 유래) 같은 멸칭이 두루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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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을 하고 서양 이름을 내건 여성들. 정식 이름 없이 살아가던 여성들은 호적에 이름을 올릴 때 세례명을 신고하곤 했다. (<여성> 193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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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싫어하는 여자(<신동아> 1932년 10월호). 남의 옷이나 가진 물건의 값을 묻는 여자,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는 여자, 어린애들은 울거나 말거나 지절대며 떠드는 여자, 걸핏하면 골내고 걸핏하면 웃고 하는 여자, 들에 나가서 함부로 드러눕고 자빠지는 여자…. 신여성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당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철수와영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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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초부터 약 20년간 한국 근현대사와 여성이라는 주제를 천착하여 <계집은 어떻게 여성이 되었나>(2004) <한국 여성사 편지>(2009)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2010) <해방공간, 일상을 바꾼 여성들의 역사>(2015) 등 단독저서를 꾸준히 써온 역사학자 이임하(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원)의 새책이 나왔다. <이임하의 여성사 특강>은 청소년용으로 발간되었지만 ‘미투 시대’ ‘성 전쟁 시대’를 가장 뜨겁게 살아내고 있는 20대와 성인 모두를 위한 역사서라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할 듯하다.

여성사는 ‘젠더’ 관점을 살려 삭제·왜곡된 역사를 호출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역사학자 거다 러너가 <왜 여성사인가>(1997)에서 지적했듯, 기존 역사는 반쪽짜리 ‘선택적 기억’에 머물렀다고 지은이는 거듭 강조한다. 남성 주류 역사가들이 선심쓰듯 ‘주변적 공헌’으로만 기록했던 한반도 여성들의 삶과 투쟁, 노동 이야기를 세심하게 복원한 까닭이다. 이 책은 ‘남성들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동안 여성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내놓는다. “여성들은 단 한번도 쉬지 않았다.”(9강 ‘노동’)

열매를 따거나 사냥을 해 먹거리를 얻은 구석기 시대 이후 여성들은 조, 수수, 피 따위를 밭에 심고 먹거리를 보관해 농업을 일으켰다. 토기를 빚었으며 옷짓는 기구를 발명한 ‘신석기 혁명’의 주체로 맹활약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 여제사장들이 있었고 7세기 동아시아 여왕들은 통일의 기반을 다지거나 다양한 종교 문화정책과 외교정책을 펼쳤다. 삼국시대 ‘처가살이혼’은 딸에게도 재산을 골고루 상속하도록 했지만 17~18세기 ‘시집살이혼’이 자리잡았고 이때부터 ‘출가외인’이라며 딸에게 재산 상속을 하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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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제작한 영화 <정조> 포스터. 남편을 잃은 여성이 재혼하면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삶을 그렸다. 철수와영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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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혐오, 문명, 정치, 결혼과 가족, 전쟁과 재건, 호명, 규범, 운동, 노동 등 9가지 분야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데, 일반적인 역사서처럼 고대사를 먼저 배치하지 않고 책머리부터 곧바로 ‘여성 혐오사’를 검토한 점이 눈에 띈다. 오늘날 성차별·여성 혐오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여성을 정숙하지 못한 허영과 사치의 화신이라며 야유하고 공격해온 결과라고 지은이는 밝힌다. 사회와 국가가 여성을 희생양 삼아 비난하고 통제하면서 가부장적 사회 질서를 흔들리지 않게 유지하고 안정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한겨레>와 통화에서 지은이는 “서로 ‘여혐’ ‘남혐’이라 대립하며 ‘성 전쟁’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이 책이 도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성 혐오는 여성들이 지금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이 강할 때, 그 변화를 가로막기 위해 더 폭발적으로 나타나곤 했다. 신여성에 대한 비난이나 한국전쟁으로 무너진 가정경제를 일으키면서 여성들이 계를 만들어 활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긍정적 측면은 쏙 뺀 채 여성의 춤바람이나 계 파탄 같은 부작용만 강조하면서 실제와 다른 담론을 만들고 ‘감정화’한 것이다. 이런 역사를 제대로 알 때 비로소 ‘혐오’가 허구적으로 구성되어왔으며 여기엔 변화를 거부하는 반동적인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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