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9 (토)

[마이 라이프] “흙·불과 함께할 때 행복… ‘막사발 전도사’는 내 운명”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40년 도공 한 길 문한조 명인

“막사발은 우리나라에서는 평범한 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도다완(井戶茶碗)’으로 불리며 집안에서 대를 물려 전해 주는 보물 취급을 받습니다.” 40년이 넘도록 도자기를 만드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문한조(61) 대표는 막사발 분야의 명인이다. 그를 만나기 위해 지난 20일 경북 고령군 성산면 운성로에 있는 야천도요를 찾아갔다. 전통가마를 갖추고 있는 야천도요는 가야산 기슭을 굽이굽이 따라 올라야 하는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사코 내세울 게 없다며 겸연쩍어하는 그를 작업장에 딸린 작은 전시장에서 마주했다. 그의 작업장 곳곳에는 1000점이 넘는 막사발과 다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조선 막사발의 전도사’라고 소개했다.

세계일보

40년간 도자기 만드는 일에 천착해 온 문한조 명인. 그는 “오늘날 한국은 장인정신이 퇴색하고, 전통명품을 만들 장인들의 대(代)마저 끊길 위기에 처해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평범한, 그러나 일본에서는 특별하게 여겨지는 막사발이 국내에서도 제대로 평가받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고 말했다.


“막사발은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들이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하다 16세기 후반부터 일본에 알려지면서 그곳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막사발은 한국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질 좋은 것은 모두 일본에 있습니다. 일본 국보가 된 도자기 ‘기좌이몽 이도’도 우리가 막사발이라고 부르는 차사발입니다.”

막사발은 막걸리의 ‘막’처럼 쉽게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고미술학계를 중심으로 이 그릇이 막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막사발로 칭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이 글에서는 혼선을 피하기 위해 과거의 예를 따르기로 했다.

그의 막사발에 대한 설명에는 주저함이나 막힘이 없었다.

“기록을 보면 기좌이몽 이도는, 도자기 전쟁 또는 차사발 전쟁이라 불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간 것입니다. 조선에 교두보를 확보한 왜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김해 향교의 도자기 제기들을 모아 일본으로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전리품을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도다완으로 알려진 조선 사발을 최고의 차도구로 쳤다고 합니다.”

이도다완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언제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고, 제작 시기나 만든 가마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 미술사학자 고야마 후지로는 이도다완의 생산지가 경남 진주 근처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 고미술학자들도 진주 서쪽의 하동군 진교면 샘골마을에 있는 가마터에서 이와 유사한 도자기 파편을 발견했다.

경남 합천이 고향인 그가 도자기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졸업을 두 달쯤 앞둘 무렵이었다. 어린 5남매를 두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열세 살에 집 근처 도자기회사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하며 일당 75원을 받은 게 사회생활의 시작입니다. 이마저도 제가 일을 하지 않으면 가족들이 굶어야 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군복무 등 10년간을 제외하면 모두 도자기와 관련한 일을 해왔다.

“돌이켜보면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흙을 만지고 불을 가까이 하던 때가 가장 보람되고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일을 할 엄두조차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자기를 만드는 것을 저의 운명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세계일보

그에게 도자기 만드는 일에 왜 그토록 애착을 갖느냐고 물었다.

“도자기는 흙과 물, 바람, 불, 공기의 조화로운 흐름 속에서 탄생하기 때문에 당초 설계와는 다른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장인들은 제대로 된 자기를 굽기 위해 가마 앞에서 꼬박 이틀밤을 새우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도자기를 가마에서 꺼낼 때의 희열은 도공들만이 알 겁니다.”

그에게도 생활이 조금은 넉넉해지고 삶의 여유가 느껴질 때가 있었다. 국내 경기가 좋아지고 생활도자기가 붐을 이루던 시절이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는 1992년 경북 고령에 한얼도자기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사업장을 가져보게 된 것이다.

“고령에 가마터를 정한 것은 어린 시절부터 깊은 인연이 있기도 했지만 순도가 높고 질이 좋기로 유명한 가야산 줄기의 고령토(高嶺土)를 손쉽게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고령토는 도자기의 기본이 되는 태토(胎土)로 잘 알려져 있어, 일제 때에도 엄청난 양의 고령토가 징발됐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입니다.”

흔히 경북 고령(高靈)에서 생산되는 흙을 지칭해 고령토라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이는 중국의 대표적 도자기 생산지인 경덕진요(景德鎭窯) 부근의 장시성 고령촌(高嶺村)에서 생산되는 흙을 지칭한다. 우연하게도 경북 고령군 일대에서는 순백색 또는 회색으로 백자, 분청사기, 청자상감자기에 사용되는 도자기의 원료인 고령토가 다량으로 생산된다.

그가 설립한 한얼도자기는 한때 40명의 직원이 함께 근무할 정도로 번창했다. 하지만 고령의 도자기회사는 IMF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다가 끝내 문을 닫아야 했다.

그는 한얼도자기가 부도 나고 재기의 희망조차 갖지 못하던 어려운 시간이 계속되자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 오사카로 떠났다. 일본에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노동을 하면서도 도자기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않았다. 막노동으로 돈이 조금 모아지자 도쿠시마와 도야마 등지에 있는 도자기 공장을 찾아다녔다.

“일본의 도자기 회사는 우리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도자기 회사에서는 불을 지피거나 청소를 하는 등 허드렛일을 무보수로 했지요. 일하는 것을 보고 금세 경험자라는 것을 알고, 산업스파이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일본 도자기의 현실과 기술을 체험하는 가장 좋은 시기였습니다.”

세계일보

그는 일본에서 지내던 5년 동안 40여 군데의 도자기회사를 돌아다니며 또 다른 도자기 세계를 경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로지 일본의 도자기를 배우고 분석하는 데 푹 빠져 지낸 시간이었다. 한번은 일본왕실 도자기를 만드는 나가사키현 다쿠시마에 있는 도요에서 조금이라도 더 배우려고 기웃거리다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일본인들이 우리 선조가 전해준 차사발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한국에 돌아가면 기필코 조선시대 때 이곳에 끌려 온 도공의 기술을 능가하는 막사발을 만들겠다고 수없이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2001년 고령에 야천도예를 설립했다. 재기를 꿈꾸는 그를 보는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생활도자기를 만들면 밥은 먹고 살 텐데, 팔리지도 않을 막사발을 만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주변의 싸늘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사발 재현에 나섰다.

“옛 문서에 나오는 흙을 찾기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 50여 군데 공사장과 야산 등지를 찾아다녔습니다. 어느 날은 옛 막사발의 색상과 질감을 내는 흙을 발견하고 며칠간 밤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그의 도요에 있는 가마에서는 한 차례에 400여개의 차사발을 넣고 불을 지핀다. 그래봐야 흡족한 막사발이 고작 대여섯점이 나올 뿐이다.

“우리나라에도 도자기를 만드는 도요는 많지만 오직 막사발에 매진하는 곳은 여기가 유일할 겁니다. 언젠가 제 손으로 조선의 도공이 만든 막사발을 능가하는 그릇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의 조선 막사발 재현을 향한 도전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제대로 된 전시회를 하려고 해도 누구로부터 배웠느냐, 어느 대학 출신이냐, 국내외 수상 경력은 있느냐는 등을 먼저 묻습니다. 변변한 학력도 훌륭한 스승도 없이 어깨 너머로 배운 탓에 지방에서 소규모 전시회를 몇 차례 한 것이 고작입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일본에서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다섯 차례 전시회를 할 때마다 차동호인들이 몰려왔다. 심지어 막사발 앞에서 무릎을 꿇는가 하면 전시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자리를 뜰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일본의 고도 교토는 도자기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교토국립박물관은 주로 헤이안시대와 에도시대에 만들어진 문화재를 수집, 보관,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자랑하는 도자기들이 많이 보존돼 있다.

“일본의 도쿄에서 제 작품이 어떤 수준인지를 평가받아 보고자 무작정 나섰던 때의 일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습니다. 현지 경찰서를 찾아가 차사발을 전시할 곳을 찾아 달라고 했지요. 친절하게도 경찰관이 문화센터 등 세 곳의 무료전시장을 소개해 주더군요. 이를 계기로 저의 막사발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길이 마련됐습니다.”

그는 전통 막사발 재현과 함께 고령지역의 문화를 대변할 도자기촌을 건립하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의 도자기 문화가 일본 메이지유신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으며, 그 중심에 고령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같은 내용을 활용한 콘텐츠와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벤트화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고령도예의 우수성을 알리는 도예촌을 건립하는 데 미력하나마 힘이 되고자 합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칠 시간이 다가오자 이 말은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도공인생 40여년이 쉽지는 않았지만 결코 후회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평범한, 그러나 일본에서는 특별한 도자기로 받아들이는 막사발이 국내에서도 제대로 평가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인생을 걸고 도기를 굽는 이유이자 희망입니다.”

글·사진=류영현 선임기자 yhryu@seye.com

●문한조 명인은…

△1957년 경남 합천 출생 △1970년 합천 고려도기 취직(13세) △1992년 경북 고령 한얼도기 설립 △2001년 경북 고령 야천도기 설립 △2008∼2014년 교토·오사카 등 일본 개인전 5회 △2008~2017년 부산·대구 등 국내 개인전 13회 △2012~2016년 국제 깃발전 등 그룹전 6회 △2012년 한국명인(막사발분야) 선정 △2013년 한국공예예술대전 심사위원 △2016년 한국미협 공예분과 위원(현) △저서 ‘나는 다시 태어나도 막사발을 만들끼다’(한국인)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 Segye.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