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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민주화 이후 정권마다 등장했던 개헌 화두, 이래서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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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개헌 이후 언제나 개헌은 정치권의 핵심 화두였다. 하지만 번번이 개헌론이 정치공학적 카드로 이용됐기 때문에 정치권의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1990년대 개헌 키워드는 의원내각제였다. 1988년 치러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과반에 크게 미달한 125석 확보에 그쳤다.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야3당 공조체제에 밀려 국정운영 동력이 약해지자 민정당 내부에서 내각제 전환이나 연립정부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속에서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한 ‘보수대연합’이 추진된다. 1990년 1월22일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 김영삼(YS) 총재의 민주당, 김종필(JP) 총재의 공화당이 합당을 선언하고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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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호남을 제외한 TK·PK·충청의 전격 결합에 ‘3당 야합’이란 비판도 나왔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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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민자당 1차 전당대회를 앞둔 90년 5월6일 “1년 이내 의원내각제로 개헌한다”는 내용의 각서에 자필 서명한다. 하지만 그해 10월 이 문건이 중앙일보에 보도되면서 여권 내부에 분란이 벌어졌다. 대통령 도전 의지가 강했던 YS가 “나를 음해하기 위해 고의로 유출시킨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내각제 개헌은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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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제합의 각서유출파동으로 1주일여 당무를 거부했던 민자당의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이 90년 11월7일 당사에 나와 김종필ㆍ박태준 최고위원의 손을 잡고 새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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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정권교체를 달성한 ‘DJP연합’도 내각제 개헌이 연결고리였다. ‘DJP연합’은 김대중(DJ) 후보로 집권에 성공할 경우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공동정부를 구성하고, 99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료한다는 합의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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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새정치국민회의를 이끌던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자유민주연합 김종필(JP) 총재가 97년 11월 3일 대선후보 단일화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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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DJ는 집권후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연합여당의 의석도 개헌정족수에 미달한다는 이유 등을 내세워 JP의 양해아래 99년 7월 내각제 개헌 유보를 공식 발표했다. 실상은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면 대통령 권력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란 관측이 유력했다.

개헌 논쟁에 다시 불이 붙은 건 2005년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다. 노 대통령은 “지역구도 극복을 위해 선거구제 개편을 받아들인다면 내각제 수준으로 대통령 권한을 이양할 용의가 있다며 한나라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완강한 거부로 소득없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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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1월11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개헌 문제에 대한 생각을 밝히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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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임기말인 2007년 ‘4년 중임제 전환을 위한 원포인트 개헌’을 다시 한번 제안했지만 박근혜 대표는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일축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4년연임 정ㆍ부통령제 개헌’을 공약했고 집권 3년차인 2010년부터 개헌문제의 공론화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차기 유력대선주자였던 박근혜 의원과 제1야당인 민주당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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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 방송좌담회에서 선거제도와 행정구역 개편에 관한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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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도 임기 초에는 개헌 논의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개헌 블랙홀’ 때문에 국정운영의 동력이 떨어진다는 우려 탓이다. 하지만 ‘최순실 비선실세’ 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한 2016년 10월 24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임기 내 개헌 추진 의지를 밝혀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바로 JTBC ‘최순실 태블릿PC’ 보도가 나오면서 개헌 제안은 없었던 얘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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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개헌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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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YSㆍDJ정부 때는 대통령의 개헌 의지 자체가 부족했고, 노무현 정부에선 대통령 힘이 빠진 뒤에야 개헌론을 꺼냈고, 박근혜 정부는 국면전환용으로 개헌 카드를 활용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며 “지금은 임기 초인데다 개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여권이 얼마나 정치력을 발휘하느냐에 성패가 달렸다”고 말했다.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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