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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IF] 그간 애썼다 생쥐야… 이젠 '칩 속의 인간'으로 신약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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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영국의 여류 작가 메리 셸리가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펴냈다. 주인공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시신 여러 구를 짜깁기하고 전기를 흘려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킨다는 내용이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지금, 일부 인공 장기나 로봇 팔·다리들이 개발되기는 했지만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아예 새로운 사람을 탄생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눈을 세포 단위로 돌리면 사정이 다르다. 인체의 다양한 장기 조직들이 손가락만 한 칩 위에 잇따라 구현되고 있다. 바로 '칩 위의 장기(organ on a chip)'이다. 여러 장기 칩을 연결하면 '칩 위의 인간(human on a chip)'까지 만들 수 있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동물 실험이 점점 퇴출되는 가운데, 칩 위의 장기·인간은 신약 개발의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동물 실험의 부작용 차단 가능

지난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허동은 교수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첨단 의료 재료'에 "인체 태반(胎盤)을 칩 위에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 연구 결과는 저널 표지논문으로 실렸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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칩은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에 파랗고 붉은 선이 맞닿아 있는 형태다. 한쪽 선에는 태반의 영양막 상피세포를, 다른 선에는 혈관 내피세포를 자라게 했다. 둘 사이에는 얇은 막을 뒀다. 연구진은 시판 중인 약물 두 종류로 태반 칩이 인체 내부와 똑같은 반응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허 교수는 "미국에서는 임신부의 80%가 임신 기간 중 최소 한 번은 약물을 섭취한다는 통계가 있다"며 "태반 칩은 임신부가 복용한 약이 태아에게 전달될지 여부를 미리 시험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과학자들이 각종 장기 세포를 칩 위에 배양하는 것은 예기치 못한 인명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1960년대 임신부의 입덧을 막는 신경안정제로 개발된 탈리도마이드는 쥐와 개를 이용한 독성 실험에선 부작용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임신부 5000여명이 기형아를 낳았다. 태반 칩이 있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일이다.

신약 실험에 쥐 대신 인간과 비슷한 원숭이나 침팬지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침팬지 역시 유전자가 인간과 완전히 같지 않다. 게다가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는 영장류 실험이 금지되는 추세이다.

◇허파에서부터 뇌·눈·생식기 칩까지

장기는 3차원 입체 형태인데 기존 배양접시의 세포는 2차원 평면이어서 약물에 대한 반응이 달랐다. 또 2차원 세포에는 맥박과 같이 인체 내부에 작용하는 힘이 미치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었다.

장기 칩은 실제 장기의 구조를 모방했다. 허동은 교수는 2010년 하버드대 위스연구소 박사후 연구원 시절 세계 최초의 장기 칩인 허파 칩을 개발했다. 공기가 흐르는 위쪽 면에는 허파 폐포의 상피세포를 깔고 피가 흐르는 아랫면에는 혈관 내피세포를 붙였다. 두 관을 맞닿게 하고 양쪽에서 진공펌프로 정기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시켰다. 숨을 쉴 때 허파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것을 모방한 것이다.

이후 간·신장·척수·심장 등 15가지가 넘는 장기 칩이 개발됐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연구진은 심장병 환자의 피부세포를 수정란에 있는 배아줄기세포 상태로 변화시킨 다음, 다시 심근세포로 자라게 했다. 이것으로 만든 심장 칩은 해당 환자에게 어떤 약이 맞는지 실험할 수 있다. 환자 맞춤형 치료가 가능한 것이다. 노스웨스턴대 연구진은 여성 생식기에서 추출한 여러 세포와 간세포를 결합한 생식기 칩을 만들어 28일의 생리 주기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장기 칩 10가지 연결한 '칩 위의 인간'

장기 칩은 본격적인 상용화 단계에 들어섰다. 위스연구소에서 창업한 이뮬레이트는 지난해 미국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간 칩을 식품 보조제와 화장품 독성 실험에 쓸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미국 제약사 머크와 허파 칩으로 천식과 호흡기 감염증 치료제 시험도 하고 있다. 독일 베를린공대 출신 티스유즈는 2~4가지 장기 칩을 연결한 복합 장기 칩으로 독성 시험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전누리 서울대 교수가 큐리오칩스를 창업해 혈관 칩을 상용화했다. 여기에 암세포를 넣고 혈관이 자라는 형태를 분석하면 암세포의 독성을 판단할 수 있다. 성종환 홍익대 교수는 심장, 췌장 등 여러 장기 칩을 하나의 칩에 묶는 연구를 하고 있다. 고려대·한림대·울산과기원 등에서도 장기 칩을 개발하고 있다.

장기 칩의 최종 목적은 칩에 인간의 모든 장기와 조직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를 이용하면 약물이 인체의 모든 장기에 미치는 영향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다. 미국 국방부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미국 MIT 린다 그리피스 교수가 10가지 장기 칩을 하나로 묶는 연구를 지원했다. 그리피스 교수 연구진은 2016년 바이오 기업 CN바이오 이노베이션과 7가지 칩의 결합에 성공한 데 이어 최근 10가지 칩의 결합도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ywl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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