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2016년 11월 96%의 찬성으로 '조합 방식' 대신 '신탁 방식' 재건축을 선택하고, 신탁사를 선정했다. 신탁 방식 재건축은 주민들이 설립하는 '재건축 조합' 대신 제3자인 신탁사가 시행을 맡아 재건축을 추진하는 방식이다. 이 아파트 소유자 이모(52)씨는 "신탁 방식이 더 투명할 것으로 생각했고, 무엇보다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를 피할 수 있다고 광고한 신탁사 홍보물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1년 4개월이 지났다. 시범아파트는 환수제를 피하지 못했다. 올해 1월에야 영등포구청에 정비계획변경안을 제출했을 뿐이다. 환수제를 피하려면 작년 말까지 건축심의→사업시행인가→시공사 선정→관리처분 신청 단계를 모두 마쳤어야 했다.
그 사이 '계산서'가 나왔다. 신탁사 측은 총 6500억원 규모 사업비를 연(年) 6% 금리로 자체 조달하겠다고 통보했다. 서울 시내 대부분 재건축 아파트의 사업비용 조달 금리는 연 3%대 중반 수준이다. 주민들은 "매년 최소 수백억원의 추가 지출이 발생한다"고 반발한다.
◇신탁 재건축, 소송 등 줄줄이 파행
신탁 방식 재건축은 단지 전체 소유주 75% 이상 동의와 동(棟)별 소유주 50% 이상 동의를 얻으면 신탁사를 시행자로 지정할 수 있다. 국토부는 2016년 3월 법률 개정을 통해 신탁 방식 재건축 제도를 도입하면서 '투명한 사업 관리'와 '사업 지연 최소화'를 예상 효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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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는 '신탁 방식 부동산 붐'이 일었다. 2016년 말 시범아파트를 시작으로 2017년에는 공작아파트, 수정아파트, 대교아파트 등 최근까지 6개 단지가 줄줄이 신탁 방식을 채택했다. 김범기 금성부동산 부장은 "신탁 방식을 통하면 올해 1월부터 시행된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를 피할 수 있다는 기대심리가 있었다"고 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여의도는 금융사가 밀집해 있어, 다른 지역보다 금융사에 대한 신뢰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 단지에서는 신탁사와 주민 간 갈등이 잇달아 터지고 있다. 시범아파트에서는 신탁사가 최근 일부 주민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대교아파트에서는 50%를 넘어야 하는 동별 동의율이 예비 시행자 지정 1년이 지나도록 특정 동에서 20%대에 머물고 있다. 수정아파트는 신탁 방식 자체를 철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광장아파트에서는 신탁사가 총 10개 동(棟) 중 8개 동만 따로 재건축하기로 하면서, 나머지 2개 동 주민들이 반발하고 있다.
주민들이 지적하는 신탁사의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허위·과장 광고다. KB부동산신탁은 작년 3월 광장아파트 사업 참여 제안서에 '사업 기간을 2년 8개월 앞당길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사업 기간 단축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없었다. 한국자산신탁은 2016년 9월 '2300가구 아파트를 기준으로 했을 때, 신탁 방식은 조합 방식과 비교해 약 2000억원의 부담금 면제 효과가 있다'는 내용이 담긴 소식지를 발행했다.
'깜깜이 계약'도 문제다. 시범아파트 주민들에 따르면, 한국자산신탁은 작년 6월 시행자 선정이 끝나고서, 9월에야 조달 금리 등을 공개했다. 소유자 이형기씨는 "부담금을 피하는 게 급해서 무조건 계약부터 했는데, 나중에 신탁사가 제안한 사업비 조달 금리가 조합 방식보다 최소 2%포인트 높았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 총사업비는 6500억원. 재건축이 끝나 입주할 때까지 조합 방식 대비 매년 130억원씩 손해를 본다는 의미다.
KB부동산신탁이 최근 대교아파트에 제시한 계약서 안(案)에도 구체적인 이자율이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자금 조달에 따른 이율은 수탁자 내부 규정에 따른 이율을 말한다'고만 표시돼 있다. 이자율을 신탁사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장상진 기자(j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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