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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전우용의 우리시대]현모양처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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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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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 인물은 누구일까? 제 아무리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사람이라도 5만원권 지폐를 두고 1만원짜리를 집지는 않는다. 정답은 신사임당이다. 지폐에 사람 얼굴을 그려 넣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인류는 오랜 세월 타인의 표정을 보고 그 마음을 읽는 훈련을 거듭해 왔기 때문에, 인물화에 특히 놀라운 식별력을 얻었다. 사람들은 지폐 속 인물의 얼굴이 익히 보던 것과 조금만 달라도 금세 알아챈다. 둘째 이유는 ‘국민교육’을 위해서다. 화폐의 도상(圖像)이 되는 사람은 국민 대다수가 존경하는 역사 인물 중에서 선정되며, 각각의 인물은 국민이 공유해 마땅한 가치들을 표상한다. 세종대왕의 애민의식, 율곡과 퇴계의 선비정신, 충무공의 위국충정 등. 신사임당은 어떤 가치를 표상하는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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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5만원권 지폐를 발행할 때, 어떤 인물을 넣을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한국의 화폐 속 인물이 전부 남성이니 반드시 여성을 넣어야 한다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누가 적임자인가에 대해서는 당연히 여러 의견이 나왔다. 후보로 진지하게 검토된 인물은 신사임당 외에 유관순과 김만덕이었다.

제주도의 기생 출신 거상(巨商)으로서 기근 때에 사재를 털어 수많은 생명을 구했던 김만덕은 지명도가 낮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유관순은 10만원권 화폐에 김구가 들어갈 예정이니 표상하는 가치가 중복되며, 여성적 가치를 표상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신사임당에 대해서는 “율곡이 이미 있는데 그 어머니까지 화폐 인물로 선정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반대가 있었으나, 한국 여성 또는 여성적 가치를 대표할 만한 인물로 그만한 사람이 없다는 주장을 누르지 못했다. 5만원권에 신사임당 초상을 넣기로 결정한 후, 한국은행은 그 이유를 “신사임당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로서, 어진 아내의 소임을 다하고 영재교육에 남다른 성과를 보여준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어진 아내이자 현명한 어머니, 현모양처(賢母良妻).

이에 대해 어떤 여성단체는 “신사임당은 유교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이상적 여성의 전형으로 자기 자신이기보다는 이율곡의 어머니요, 이원수의 아내로서 인정받고 있다. 어머니, 아내만이 보편적 여성상으로 자리 잡는 것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으나, 많은 사람들은 현모양처를 모범으로 삼는 것이 왜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신사임당은 ‘유교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이상적 여성의 전형’조차 아니다. 신사임당은 결혼 후 20년 동안 주로 친정에서 살며 시집 일은 거의 돌보지 않았다. 4남 3녀를 낳았지만 율곡 말고 특별히 잘된 자식도 없었고 남편을 크게 출세시키지도 못했다. 그는 오히려 그림 그리는 일에 열중했다. 신사임당이 현대에 환생해서 당시 살았던 방식대로 산다면, 결코 현모양처라는 말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유교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요구한 기본 덕목은 ‘삼종지도(三從之道)’였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자식에게 순종하는 것이 여성이 평생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이다. 순종은 자아(自我)를 용납하지 않으며 독립적 사유(思惟)를 배격한다.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질은 ‘말 잘 듣는 것’뿐이다.

현모양처론은 유교 가부장제의 덕목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창안되어 20세기 초 한국에 유입된 ‘천황제’ 국민국가의 여성관이다. 일본 천황제 국민국가가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은 남성이 천황에게만 충성할 수 있도록 가정을 맡아 꾸리며 자식을 충성스러운 신민(臣民)으로 기르는 일이었다. 현모양처라는 용어는 성인 남성을 가정에서 완전히 이탈시켜 천황에 직속된 신민의 일원(一員) 자격만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가정에 생긴 ‘권위(權威)의 공백’을 제국 신민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책임을 자각한 여성의 자발적 헌신으로 메꾸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을사늑약 직후인 1906년에 양규의숙(養閨義塾)이 ‘현모양처 양성’을 설립 취지로 내세우면서부터 이 단어 사용이 일반화했다. 이후 오랫동안 여성의 자아실현은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라는 담론이 대다수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했다.

동전에는 양면이 있는 법이어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는 밖에서 일하면서 ‘가정사’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 남편이자 아버지, 가정 안에 자기 자리를 만들지 않는 남편이자 아버지가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생각을 낳았다. 집 밖에서 일자리를 잃고 집 안에도 발붙일 곳 없어 하루 종일 공원을 배회하는 한국의 노년 남성들 역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인 셈이다.

일본 군국주의가 심어 놓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민족 고유의 전통’인 양 착각하며 산 지도 한 세기가 넘었다. 의식이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다. 여성과 남성의 공간을 집 안과 집 밖으로 나눌 수 없게 된 지 오래임에도, 집 밖에서 활동하는 여성을 ‘제자리를 잃은 여성’이나 ‘남성의 영역을 침범한 여성’으로 취급하는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작금의 미투운동은 남성 중심으로 편제된 집 밖 사회에서 여성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피해를 입어 왔는지 여실히 폭로하고 있다. 이제는 성인군자니 영웅호걸이니 요조숙녀니 현모양처니 하는 성차별적 가치관을 담은 말들을 박물관 수장고로 보낼 때다. 미투운동은 현재의 성 역할에 관한 가치관을 전면 재구축하는 대각성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 각각 ‘애국자’와 ‘현모양처’로 나뉘는 세상보다는 남녀 구별 없이 착한 사람, 성실한 사람, 정직한 사람, 배려하는 사람, 존중하는 사람으로 통합되는 세상이 더 좋고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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