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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수)

[초동여담] 가해자의 정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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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아시아경제 임철영 기자] "참담하다."

그를 지지했던 지인은 적절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희소식도 충격과 참담함을 덜어내기 부족했단다. 누구보다 자주 민주주의를 언급했고 정당정치와 시스템의 가치를 강조해온 정치인. 화려함 뒤에 가려져 있었던 그의 추악했던 일상을 다시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 했다.

열성 지지자들의 감정도 시간이 흐를수록 분노로 바뀌었다. 그들은 "윤리가 결여된 예술가의 작품이 가치가 없듯, '가해자의 정치철학'은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가 없다"고 선언하고 모든 활동을 종료했다. 화려한 수사 속에 설 익은 논리를 발견하고도, 그가 좋은 정치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랐던 지지자들에게 남은 건 극단적 상실의 후유증을 보였다.

그의 정치철학엔 일상적 권력관계와 인간 존엄에 대한 실천적 고민이 결핍돼 있었다. 대통합, 대연정, 보수 통합론, 새 정치, 민주주의 등 거대 담론을 말하는 데 익숙했으나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실질이 부족하니 정책보다 민주주의 원칙의 중요성을 언급하다가도 제도만 민주주의를 굳건하게 한다는 식의 자기모순에 빠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의 '언어의 한계는 세계관의 한계'였고, 그는 체화하지 못한 담론에 갇혀 허상을 쫓았다.

신념과 실제로 보는 것 사이의 불일치나 비일관성을 의미하는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결핍은 그렇게 조직화된 맹목적 추종자들과 화학적 융합을 통해 절대 약자였던 한 여성의 존엄을 처절하게 짓밟았다. 한 여성운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거대담론을 지지할만한 내밀함의 결핍이 권력의 추악한 일상을 만들었다."

성역 없는 '미투(#MeToo)' 운동에 대한 공감이 확산되자 정부는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법정형 상한을 징역 10년으로 높이기로 했다.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조직적 은폐와 방조 행위도 형사법 처벌 대상에 포함한단다. 그러나 회의감이 먼저 앞선다. 바뀐 법이 약자를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까. 그간 법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법은 대부분 권력자와 가해자에게 유리했고 돌이킬 수 없는 희생을 치르고야 바뀌었다.

권력은 본질은 폭력이다. 공론의 장(場)을 거친 공감이 일상 속에 뿌리내리지 못하면 권력 관계에서 약자의 보호와 젠더(gender) 문제가 풀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금도 어떤 권력은 "민망한 사건들이 좌파진영에서만 벌어지고 있고 좀 더 가열차게 좌파들이 더 걸려들었으면 좋겠다"는 천박한 시각을 소비하고 있다. '가해자의 정치철학'을 닮았다. 그들에겐 사회운동가이며 소설가인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책 '타인의 고통' 일독을 권한다.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임철영 기자 cyl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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