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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수)

[편집장 레터] 상식적인 사회로 가는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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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폭로로 시작된 한국형 미투의 후폭풍이 거세다. 문학·연극·영화판을 넘어 이제 정계·학계·의료계·기업까지 전방위를 아우른다.

가해자는 대부분 권력을 손에 쥔 이들이다. 왜 권력을 쥔 이들은 그렇게 자신의 잘못에 둔감해지는가.

아일랜드 인지신경과학자 이안 로버트슨이 쓴 책 ‘승자의 뇌(The Winner Effect)’에 ‘권력은 명석한 사람의 판단마저도 흐리게 만든다’는 내용이 나온다. 로버트슨은 애덤 갈린스키 켈로그 경영대학원 교수의 실험을 소개했다. 일명 ‘이마에 알파벳 E 그리기 실험’이다.

갈린스키는 실험 참여자의 절반에게 “눈을 감고 1~2분 동안 권력을 행사하고 명령했던 경험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글로 간략히 적으라”고 했다. 나머지 절반의 참여자에게는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았던 경험을 떠올리고 글로 적어보라” 했다. 그다음 자기 이마에 E자를 쓰라고 시켰다. 재미있게도 권력을 행사한 경험을 떠올린 이들의 33%가 자신이 보는 방향에 맞춰 E를 그렸다. 반면 명령을 받은 기억을 떠올린 이들은 12%만이 그렇게 그렸다. 자신이 보는 방향에 맞춰 E를 그리면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상대방은 거꾸로 된 모양의 E를 보게 된다. 반대 방향으로 그리면 상대방은 제대로 된 E를 볼 수 있다. 권력을 행사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줄어들고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험이다.

또 다른 실험도 있다. 주사위를 굴려 숫자를 맞히는 게임이다. 주사위는 누가 던지든지 나오는 숫자는 무작위다. 그런데 게임 전에 권력을 행사한 기억을 떠올린 그룹은 스스로 주사위를 굴리는 경향이 높았다. 반대 상황을 기억한 그룹은 다른 사람이 주사위를 굴리게 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스스로 주사위를 던진다는 것은 자신이 던져서 숫자를 맞힐 수 있다는 기대가 높기 때문이다. 절대 통제할 수 없는 변인을 자신은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도 연결된다. 이를 ‘통제 환상’이라고 한다. 역시 권력을 행사한 기억만으로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통제 환상’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두 가지 실험이 뜻하는 바는 명확하다. 권력을 누리는 이들은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권력자들의 성추행이 유독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뇌가 문제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주는 압박은 돈이나 업무나 공포보다도 ‘사회 평가적 위협’이다. 권력 박탈, 사회적 배척, 왕따 등으로 연결되는 ‘사회 평가적 위협’은 실제 면역체계와 건강에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꼽힌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권력자들은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는, 스스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에서 비롯된 행위로 인해 인생의 최고 스트레스인 사회 평가적 위협을 받고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공식이 사회적인 상식으로 자리 잡아야 할 터다.

더불어 작금의 미투 앓이 후에는 한국 사회가 좀 더 건강한 사회가 되리라 믿어본다. 지난 연말 수많은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저자 김승섭 고려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폭력은 몸이 기억한다’고 얘기한다. 보통 폭력을 경험한 사람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난다.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경우, 그리고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가는 경우다. 이 중 우울 증상 유병률이 가장 높은 집단은 당연히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이들이다. 이제 당당하게 ‘나는 이렇게 폭력을 당해 아프니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의 초입에 우리는 서 있다.

[김소연 부장 sky6592@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49호 (2018.03.14~2018.03.2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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