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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여행반올림#] 비현실적인 그 섬에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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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은모래 백사장 근처에 마침 J 가족이 살아서 서울에서도 자주 못 보는 J를 남해에 와서 만났다. J는 '비현실적'이라고 했다. 말과 글을 다루는 J가 "세상 참 좁다" "믿기지 않는다" 이런 말 대신에 말과 글의 중간쯤 되는 '비현실적'이란 단어를 반복적으로 썼다.

봄밤 바닷소리에 엉킨 찻집의 유자 향이 몽환적이어서 그랬을까. 수달이 가끔 올라온다는 수로를 거닐 때쯤에는 나도 현실감을 잃기 시작했다. J의 아내는 자녀 교육을 위해 연고도 없는 남녘땅에 정착했고, J는 주말이면 남해행 야간버스를 탄단다. 420㎞의 이격(離隔)을 훌쩍 날려버린 부부의 이야기는 가히 비현실적이었다.

비현실감은 다음 날로 전이됐다. 여관 주인장은 아침에 전복죽을 쑤어 주었다. 그는 미생물학을 전공하고 서울살이 하다가 다섯 살 아이를 위해, 다르게 키우기 위해 직장을 버리고 귀향했단다. 이 여관을 애용하던 한 사내는 남해가 좋아 여관 옆 민가를 빌려 책방을 냈다. 하루 다섯 시간만 영업하는 이 책방에 책은 달랑 수십여 권, 어릴 적 본인의 그림일기가 걸려 있다. 책방에서 방명록을 다 써본다.

이 섬 한복판 호숫가엔 미술관이 있다. '바람 흔적'이란 멋들어진 옥호(屋號)를 건 관장은 입구 칠판에 이렇게 적었다. '산다는 건 참 끝없는 그리움과 기다림'. 이쯤 되니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그들은 필시 저 바다를 앓았을 것이다. 이겨내지 못할 무병처럼, 이들은 다시 오거나 눌러앉았다. 그리고 현실 밖에 서 있기로 작정한 듯하다. 백사장에서 함께 곁불 나눈 마을 학부형들, 인심 좋은 멸치쌈밥 아주머니. 사람들은 자연을 닮아가는 것일까. 안개 품은 남(藍)빛 바다의 묵언 수행 같은 모습을.

내려놓지 못하는 욕심, 정의로 포장된 분노. 이 호젓한 남쪽 바다에 그런 것들을 슬쩍 무단 투기하고선 고해성사를 마친 듯 돌아갈 심산이었다. 알리바이로 그저 풍경화 한 장 담아올 요량이었는데, 끌러 보니 인물화였다. 사람이 들어가 풍경이 생명을 얻는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다시 간다 해도 풍경화만 건져오긴 힘들 터이지만.

[조영석 아시아나항공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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