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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토)

[광화문에서/전성철]여자 하나, 친구 둘, 후배 셋… 얼음장처럼 투명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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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전성철 사회부 차장


10년 전 법원 취재를 담당할 때 일이다. 급하게 물어볼 일이 있어서 서울고법의 한 형사부 부장판사께 전화를 드렸다. 재판이 열리는 날이 아닌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배석판사들과 합의를 하느라 전화를 못 받나’, ‘중요한 손님을 만나나’ 생각했다. 그런데 몇 번을 다시 걸어도 전화 연결이 안 됐다.

그로부터 며칠 뒤 사무실로 찾아가 그분을 만났다. 조심스레 전화를 못 받을 사정이 있었는지 여쭤보았다. 그분은 “유력 정치인과 대기업 등을 담당하는 부패사건 전담 형사부를 맡은 뒤로는 가족 외에는 휴대전화 통화를 안 한다”고 설명했다. 부속실을 거치는 구내전화는 통화한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있지만 휴대전화는 그렇지 않아서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취지였다. 그는 형사재판을 할 때는 학교 동문 모임도 안 나간다고 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평소 꽤 가깝다고 생각했던 분이라 조금 서운한 감정도 들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그 부장판사는 대법관이 됐다. 대법관이 된 후에도 그분은 언론이 관심을 가질 법한 민감한 사건을 맡으면 휴대전화를 받지 않는다. 어쩌다 한 번 연락이 닿으면 “퇴임하면 편하게 만나자”며 미안해하신다. 그분은 분명히 취재원으로는 빵점짜리다. 하지만 국민으로서는 그런 분이 공직에 계신 건 감사한 일이다.

법원과 검찰청이 고위 공직자의 비리와 추문으로 연일 시끄럽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 수감된 지 1년 만에 전임자인 이명박 전 대통령마저 100억 원대 뇌물 수수 혐의로 포토라인에 서게 됐다. 서울동부지검에는 안태근 전 검찰국장의 성추행 의혹 등 검사들의 성추문을 수사하는 특별조사단이, 서울북부지검에는 강원랜드 채용비리 수사 외압 의혹 특별수사팀이 꾸려졌다. 수행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서울서부지검에 출석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를 시작으로 ‘미투 운동’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공직자들도 줄줄이 법정에 설 것으로 전망된다.

한 법조계 고위 인사는 이런 상황이 “공직자가 처신의 기본인 ‘원, 투, 스리’ 원칙을 못 지켜서 그렇다”고 분석했다. 그가 설명한 ‘원, 투, 스리’ 원칙의 첫 번째는 여자는 아내 한 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을 마음에 두면 일에 소홀해지고 은밀한 사생활을 지키려고 부정한 재물에 손을 대거나 권한을 엉뚱하게 휘두르며 타락하기 쉽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런 예를 숱하게 알고 있다.

두 번째 원칙은 공직자는 친한 친구를 둘 이상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직자의 본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공명정대하게 행사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을 봐줘야 할 친구가 많은 마당발이 좋은 공직자가 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다.

마지막 원칙은 후배를 셋은 키워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사람을 만들어 요직에 심으라는 뜻이 아니다. 인품과 실력을 두루 갖춘 후배를 교육하는 데 힘쓰라는 의미다. 공직 역시 다른 민간 영역과 마찬가지로 혼자서 모든 일을 해낼 수는 없다. 뜻을 함께하는 훌륭한 후배가 필요하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두려울 만큼 투명해지고 비밀이 사라지는 세상에서 대과(大過) 없이 공직을 마무리하는 것은 점점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여자 하나, 친구 둘, 후배 셋.’ 쉽지 않은 기본을 지키는 일은 그래서 더 중요해졌다.

전성철 사회부 차장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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