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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94년 제네바합의 데자뷔? … 미 “비극 속편 만들진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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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대화 실패사로 본 교훈

김일성 핵동결 제안과 상황 비슷

8년 뒤 북 핵개발 드러나 합의 깨져

24년간 북·미 합의·파기만 5차례

“두 지도자 성격상 결렬 땐 상황 복잡”

“준비 없이 협상테이블 앉는 건 위험”

미 언론, 북 시간끌기 우려 목소리

중앙일보

지난 20여 년간 북한과 미국은 합의와 파기를 반복했다. 사진은 1994년 6월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을 만나는 모습.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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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간의 급속한 관계개선과 북한 측의 남한 기업인에 대한 방북 허용으로 해빙무드가 확산되고 있다.”

중앙일보가 1994년 12월 27일 보도한 ‘94년 해외 10대 뉴스’ 기사의 일부다. 당시 기사엔 “1년 반 동안 지루한 공방전을 벌여온 북핵 협상이 10월 1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극적으로 타결됨으로써 한반도 핵 위기가 고비를 넘겼다”고 돼 있다. 그러나 그 뒤로 24년이나 지났지만 북핵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악화일로였다. 이번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회담이 전격적으로 성사됐지만 과거 북·미 대화의 실패사도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미 정부 고위 관계자는 지난 6일(현지시간) “우리는 결말이 매우 나쁜 영화의 최신 속편을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니다”며 이전 정부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미국 주요 언론에선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결정에 대해 “비핵화 검증수단이 전혀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재자(김정은)에게 상을 줬다”(워싱턴포스트), “제대로 된 준비 없이 김정은과 협상테이블에 앉는 건 걱정스러운 일”(뉴욕타임스), “핵보유국 인정을 받겠다는 북한 목표가 변경됐다는 어떤 근거도 없다”(월스트리트저널)는 등 비판적 평가가 쏟아지고 있다. 북한이 지난 20여 년간 북·미 대화를 시간끌기용으로 이용해 왔다는 불신이 깊게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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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주 전 노동당 비서가 로버트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와 94년 제네바 합의에 서명하는 모습. 북한은 지난달 기록영화를 내보내며 이 장면을 공개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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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첫 북·미 고위급 회담은 92년 1월 22일 뉴욕에서 이뤄졌다. 김용순 북한 노동당 중앙위 비서와 아널드 켄터 미 국무부 차관과의 회담이었다. 미국은 회담은 단 1회로, 회담 목적은 “북한 지도부에 직접, 미국의 의사를 명확히 하는 것”에 한정했다. 당시에도 북한을 ‘협상’ 대상으로 보는 데 미국 내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대화는 클린턴 정부에서 시작됐다. 93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사찰을 거부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면서 발생한 1차 북핵 위기가 계기가 됐다. 이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94년 6월)과 고위급 회담 등이 이어지며 94년 10월 21일에 제네바 합의를 도출했다. 북한의 핵 시설 동결과 이에 따른 경수로·중유 제공 등의 보상이 담겼다.

김일성 주석은 카터 전 대통령에게 미국이 대북 핵공격을 하지 않고 경수로를 제공해주면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IAEA의 영변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또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제안도 수락했다. 하지만 김일성이 94년 7월 갑자기 사망하면서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현재의 상황은 94년과 아주 유사하다. 김정은이 김일성의 패턴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고, 여기에 그에 못지않은 트럼프 대통령이 상대하고 있다”며 “양쪽 다 자기가 결정할 수 있다는 스타일이기에 최종 담판을 위한 좋은 장이기도 하지만 결렬됐을 때 수순은 훨씬 더 복잡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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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방북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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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소강 상태를 보이던 북·미 관계는 빌 클린턴 정부가 포괄적 대화로 문제해결을 시도하면서 수교 직전까지 갔다. 2000년 10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과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의 방미가 이뤄졌다. 그러나 임기 말 클린턴 정부는 추진력이 급속히 떨어졌다. 차기 대통령인 조지 W 부시 당선자 측의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의회의 협조를 얻지 못했고, 막바지 단계였던 중동평화 협상에 우선순위도 밀렸다. 결국 그해 12월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과 새로운 협정을 준비할 시간이 임기 중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말이었지만 지금 트럼프 대통령은 불과 2년차이고 북한이 코너에 몰려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거래가 성사됐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에고(ego)가 센 사람”이라고 말했다. 서정건 경희대 정외과 교수는 “주로 공화당이 그동안 북한과의 대화와 타협에 비판적이었는데, 트럼프는 공화당이기 때문에 북한과 협정을 맺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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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 조명록 북한 국방위 제1부위원장은 미국을 찾았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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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네바 합의는 2002년 10월 미 대통령 특사단 방문에서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진행을 실토하면서 깨졌다. 합의 후 영변 핵 시설에 대한 동결·사찰도 한동안 이뤄졌지만 북한은 2002년부터 사찰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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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左), 김정은(右)


이후에도 6자회담의 성과로 도출된 2005년 9·19 공동성명에는 북핵 해결을 위한 로드맵(핵무기 파기와 NPT 복귀, 북한에 에너지 제공)이 담겼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합의 직후 미국은 북한과 거래하는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대한 제재에 나섰고, 북한은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2007년엔 2·13 합의와 10·3 합의도 이어졌지만 북핵 검증방법을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2008년 북한은 외무성 담화를 통해 “검증 방법은 현장 방문, 문건 확인, 기술자들과의 인터뷰로 한정된다”고 밝혔고, ‘검증 의정서’ 작성도 거부했다. 한·미·일 등은 “핵 시설 현장에서의 시료 채취(샘플링)는 필수적”이란 원칙을 고수했다. 결국 그해 12월 이후 6자회담은 중단됐다.

오바마 정부 때인 2012년에도 2·29 합의(핵·미사일 도발 중단, 24만t 식량 지원)도 도출했지만 북한은 장거리 로켓 ‘은하 3호’와 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런 과거 사례에 비춰볼 때 북핵 전문가들은 트럼프-김정은 회담이 성공하려면 북한이 얼마만큼 비핵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느냐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은다.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김정은이 예전처럼 이런저런 조건을 달고 비핵화하겠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미국은 외교적 해결을 포기하고 군사적 행동으로 갈 수 있는 명분을 축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유미 기자 yumi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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