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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모성은 여성을 급진적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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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 아들의 엄마와 시인 사이에서 갈등한

페미니즘 비평가·시인 아드리안 리치

가족 경계 넘어 여성·타자 보듬는 모성

“여성의 탄식 들어주는 치유적 시”




한겨레

모성과 모성 경험에 관하여
한지희 지음/소명출판·2만2000원


“아이들은 나에게 지극히 정교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내 신경을 건드려 (관대함을) 거덜 나게 만들고, 그들의 끊임없는 요구가, 단순하고도 인내심을 보이면 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 요구를 못 들어준다는 데 대한 절망감, 내 운명에 대한 절망감을 마음속에 가득 채우며, 이건 내가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죽게 되면 그제서야 우리가 서로에게서 헤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그런 때면 나는 사생활과 자유로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불임 여성들에게 부러움을 느낀다.”

시인이자 페미니스트 비평가인 아드리안 리치가 세 아이를 키우면서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급진적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그녀에게도 시대가 요구하는 현모양처가 되어보려 무진 애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1929년 미국의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리치는 두 딸을 문학가로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의 각별한 훈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하버드대에 진학한 뒤 꾸준히 시를 써서 ‘예일 청년 시인상’을 수상했고, 졸업 무렵 펴낸 첫 시집 <세상 바꾸기>는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하버드대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던 남편과 결혼해 세 아들을 연이어 낳아 기르면서, 당대 최상위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자 촉망받는 시인이었던 그녀의 삶은 위태롭게 흔들린다. 리치는 1950년대 미국의 시대정신이던 ‘행복한 가정’을 구현하고자 가족에 헌신하지만 “남편의 경력을 내 경력보다 우선하며 시 창작을 마치 부업인 듯 미루고 가사를 돌보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무기력과 우울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우아한 부인과 집안의 천사인 동시에 요리사, 부엌데기, 세탁부, 가정교사, 보모의 역할을 모두 떠맡은” 여성의 일상을 자조하면서도, 자기만의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자신을 “칼리, 메두사, 자기 새끼를 잡아먹은 암퇘지, 여성성을 저버린 여성답지 않은 여자, 니체가 말한 괴물”이라 질책한다.

한겨레

아드리안 리치. 사진 닐 보엔지. 소명출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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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 끝에 리치는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성소수자는 물론 인종적, 계층적,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인권운동과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사회적 명망은 높아졌지만 부부 관계는 악화됐고, 이혼을 요구하는 리치에게 남편 콘래드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답변을 되돌려준다. 리치는 “훌륭한 교수이자 가정적인 남편을 잡아먹은 괴물 같은 레즈비언”이라는 비난 속에 아이들과 함께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한다.

‘모성은 여성을 급진적으로 만든다’는 선언으로 대표되는, 모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그녀가 세 아이를 키우고 시를 쓰면서 끈질기게 사유한 결과물이다. 리치는 “아이가 태어나 처음 눈을 맞출 때 아이와 나 사이에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상호신뢰의 관계장이 형성되는 것을 느꼈다”며 이러한 상호신뢰의 정서적 관계가 가부장적 사회권력이 강요하는 자기희생적, 일방적 모성애와는 다른 차원의 감정적 결속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봤다. 나아가 이러한 모성 경험을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 다른 사회적 존재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한지희 경상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는 <모성과 모성 경험에 관하여>를 통해 아드리안 리치의 삶과 작품세계, 페미니스트 비평가로서의 작업을 조명하면서, “리치가 자신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그러했듯 ‘어머니-되기’라는 모성 경험을 통해 모성애를 가족 및 사회적 관계망에서 창의적으로 시도해보라”고 제안한다. 가부장적 가족체제의 산물인 모성애와 페미니즘을 연계하려는 리치의 시도는 당대의 페미니스트들과 멀어지는 이유가 됐지만, 사회변혁을 외치는 ‘선지자’가 아니라 평범한 여성들의 탄식이나 침묵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치유자’로서 그녀가 쓴 시는 “한 여자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다른 여자들의 슬픔과 외로움을 보듬어주려는 애정 어린 관심으로, 상처를 딛고 함께 성장하려는 자매애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수하물과 같다”고 말한다.

저자의 이런 제안은 “육아 문제 해결을 위한 현실적 제도적 방안을 마련하라”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보다 속 시원하지는 않지만, 가부장적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온 시간을 자책하며 ‘#미투’를 마음속으로만 응원하는 소심하고 평범한 여성들에게 “자신의 일상으로부터, 비로소 시작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다가온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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