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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레드선, 유아 동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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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새난슬의 평판 나쁜 엄마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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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우리 가족은 아이를 데리고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가슴 들뜬 출국의 기억은 있으나 입국의 기억은 없는 희한한 여행(고행)이었다. 입국의 과정이 너무 험난했기에 연약한 나의 멘탈을 보호하려 스스로 기억을 삭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가끔 메아리처럼 내 귓가를 맴도는 소리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진짜 짜증 나. 아! 너무 시끄럽네!”

반복적으로 들리는 신경질적 외침. 딸과 외출할 때면 들리는 환청. 그 외침은 이제 내 심장을 폭행하는 둔기처럼 느껴진다. 늘 사람들이 나와 딸을 주시하며 비난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힐 지경이다.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나는 자가 치료를 감행하기로 했다. 신통방통하다는 최면치료사를 마주한 척, 나는 두 눈을 감고 입국한 날로 돌아가 본다.

“제 딸이 보여요. 일본 공항 책 판매대에 앉아 잡지를 마구 뒤지고 있어요. 한국 망신, 국제 민폐를 끼치려는 것 같아 두려워요. 제가 다가가서 주의를 줬어요. 딸은 그림책을 찾는다며 계속 뒤져요. 양팔을 잡고 판매대에서 떼어내려는데 제 곁을 지나는 백인 부부가 저를 이상한 눈으로 봐요. 애를 거칠게 다루는 엄마를 책망하는 눈빛 같아서, 아이를 다시 타일러 보아도 안 통해요! 딸이 화가 나서 저를 취소하겠대요. 엄마를 취소할 거야! 유아 번역기를 돌리자면… 내 곁에서 얼씬대지 말고 영영 사라져! 저와 딸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아요. 너무 화가 나요.”

“괜찮아요. 깊게 심호흡을 하고 그다음 기억으로 넘어가세요.”

“간신히 입국 절차를 마치고 비행기에 탔어요. 면세점의 장난감 강아지가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딸의 증언을 무시하고 납치하듯 딸을 안고 비행기를 탔어요. 둘 사이의 긴장감은 더 상승했어요. 비행기가 이륙한 뒤 1시간 동안은 딸이 만화를 보고 있어서 순탄했어요. 하지만 기압 차이 때문인지, 입막음용으로 건넨 과자 탓인지, 아이가 배가 아프고 머리도 아프다며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해요. 주변 승객들이 술렁거려요. 아! 씨! 어휴! 조약돌 같은 비난의 감탄사가 저와 딸에게 날아들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온 가족이 딸을 달래는데도 아이는 고통을 호소하며 엉엉 울어요. 심장이 손톱만 해지고 죄송함의 그래프가 우주까지 치솟은 것 같아요.

영겁 같은 시간이 지나고 비행기가 겨우 한국에 도착했어요. 딸은 빨리 내리고 싶다며 몸을 뒤틀며 울고, 이제 영영 만날 일 없는 앞자리의 승객이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어요. ‘진짜 짜증 나. 아! 너무 시끄럽네!’ 죄인처럼 비행기에서 내린 가족들이 짐을 찾으러 간 사이, 저는 기절하듯 잠든 아이를 안고 휴대용 유모차를 기다려요. 동반 기절하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며 버티는데… 맙소사 큰 봉투에 넣은 유모차를 바닥에 내려놓네요. 행인의 온정을 기대하며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저는 품에서 흘러내리는 아이를 안은 채 봉지를 풀고, 저렴하지만 불편한 유모차를 펴 보려고 안간힘을 다해요. 그러다 제가요, 어떡해. 방귀를 뀌고 말았네요. 뿡! 야무지게. 극한의 상황에서 유모차를 펴다 에티켓을 잊은 거죠…”

“이런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정새난슬 씨, 어쩌면 방귀를 뀐 것이, 승객의 비난보다 더 충격이었던 것 아닐까요? 방귀의 기억을 덮기 위해 승객의 외침을 방패로 삼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평소 몰래 했던 행동을 대중 앞에서 저지른 것에 대한 상처가, 환청으로 나타나는 것 같군요. 물론 어떤 결론이든 저는 정새난슬 씨를 지지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모두 아이 만큼이나 미숙한 존재니까요.”

정새난슬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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