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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그들의 잘못이지 우리가 약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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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교양인·1만3000원


여성주의 연구자인 정희진은 최근에 펴낸 책 <혼자서 본 영화>에서 자신이 영화중독자임을 고백한다. 그는 영화 말고도 탄수화물, 활자, 일 중독인데, 나머지 셋과 달리 영화는 ‘폭식’을 해도 괜찮고 몸을 상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고마운 중독’인 영화 가운데서도 기꺼이 ‘내 인생의 영화’라고 꼽는 28편에 대한 정희진 특유의 날카롭고도 뜨거운 글들을 모았다.

미투 운동이 확산되는 요즘 읽기에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구절들이 많다. 이를테면 10대들의 잔인한 세계를 그린 이와이 슌지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에서 성폭력을 당한 뒤 삭발을 하고 학교에 나타난 소녀를 떠올리며 이렇게 쓴다. “상처의 크기는 권력의 크기이기도 하다. 상처를 강조하면 상대방의 권력도 커진다. 그 소녀는 상처받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권력에 저항하고 그들을 비웃는다. (…) ‘우리’는 상처받았음을 강조하는 대신 저들의 폭력을 폭로해야 한다. ‘우리’의 상처가 크고 작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 문제는 ‘그들’이 사는 메커니즘 자체이고 그들의 잘못이지 ‘우리의 약함’이 아니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6)에서 평생 당하기만 했던 마츠코의 역설적 ‘강인함’을 예찬한 글 뒷부분도 그렇다. “어려운 일이지만 조금 힘을 내서 우리 자신을 지켜내는 바람직한 방식을 찾을 수 있으면 한다. 결국 자신의 역량을 믿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는 그 다음이다. 피해도 억울한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전통 스릴러의 공식에서 남녀의 위치를 바꾼 제인 캠피언의 <인 더 컷>(2003)과 마조히즘적 성적 취향을 가진 여성의 파국을 강렬하게 그린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2001)를 다룬 글에서는 젠더 감수성이 예민한 여성들조차 자주 놓치곤 하는 남성중심사회의 공고한 성적 질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돋보인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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