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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상상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 ‘인종적 민족’을 직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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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민족 연구에 매진한 앤서니 스미스

민족에 대한 근대주의·원초주의 모두 비판

전근대부터 이어져온 ‘인종적 민족’ 주목




한겨레

민족의 인종적 기원
앤서니 데이비드 스미스 지음, 이재석 옮김/그린비·2만9000원


오늘날 세계질서의 기본 단위로 자리잡은 ‘민족’(nation)과 ‘민족국가’(nation state) 개념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근대의 산물’이라는 관점과, 역사적 공동체로서 실재해왔다는 관점의 대립이 대표적이다. 영국 런던정경대학(LSE) 사회학과 교수였던 앤서니 스미스(1939~2016)는 이런 논쟁의 가운데에 서서 민족 관련 연구를 한 단계 심화시킨 학자로 평가받는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민족의 인종적 기원>은 그가 1986년 펴냈던 책으로, 민족에 대해 서로 다른 두가지 입장을 모두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전근대로부터 근대로 이어지는 민족 개념의 역사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다듬는다.

우선 지은이는 민족 개념에 대한 두가지 서로 다른 관점을 ‘근대주의’와 ‘원초주의’로 나눈다. 근대주의는 “민족이 자연적이거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자본주의, 관료제, 세속적 공리주의와 같은 근대적인 발전의 산물로서, 순수하게 근대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근대의 산물인 민족 개념을 전근대로 소급해 적용할 수 없다며,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불연속성을 강조한다. 이에 맞서 ‘원초주의’는 “전근대 시대, 심지어 고대 세계에도 ‘근대적’ 개념에 필적하는 민족적 정체성과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근대에나 근대에나 민족은 인간 경험의 통합적 요소로서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집단의 단위라는 것이 이들의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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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800년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샤를마뉴) 국왕이 서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하는 대관식 장면. 강한 종교적 색채를 띤 강력한 왕조라는 동기는 ‘프랑스인’이라는 관념을 고착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61년 프리드리히 카울바흐 작품.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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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관점의 한가운데 지점에 선 지은이는, 먼저 ‘인종적 민족’(ethnie)라는 자신만의 개념을 제안한다. 프랑스어에서 따온 이 말은 “언어, 풍속, 교양을 같이하는 자연적 인간 집단” 정도로 풀이된다. 지은이가 볼 때, ‘민족’이 근대의 산물인 것은 맞지만, “민족정체성의 의미가 역사적 기록에 남긴 자국대로의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당대 민족정체성의 근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차단”한다. 때문에 그는 전근대 시대에 언어, 종교, 민족성, 영역 등에 기초한 원초주의적 인간 정체성을 ‘인종적 민족’이라는 개념을 통해 검토해보고, 이것이 근대에 형성된 ‘민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피려 한다.

인종적 민족은 생물학적이거나 혈연적인 것이 아닌 문화적인 것이다. “인종적 민족은 구성원을 결속시키고 국외자로부터 구별해주는 하나 이상의 ‘문화적’ 요소로써 구별된다.” 그 요소들로는 “공유한 조상의 신화, 역사, 문화와 특정한 영역, 연대의식, 이름을 가지는 집합” 등을 제시한다. 이런 틀로 보면, 인종적 민족은 사실상 역사의 전 시기에서 광범위하게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지은이는 이것이 “간혹 중단되긴 하지만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오래 지속된다”며 ‘지속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민족은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 주장하는 원초주의자들의 입장과 구분된다. 한번 만들어진 인종적 민족이란 정체성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확산, 전수, 변화, 소멸하는 등 다양한 양태를 보일 수 있다는 시각이 여기에 배어 있다.

이처럼 이어져온 전근대의 인종적 민족 개념이 근대에 들어 새로 나타난 민족 개념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이 책의 핵심 논의다. 근대 민족과 민족국가의 형성이 “분업 분야에서의 혁명, 행정·통제 분야에서의 혁명, 문화적 협동 분야에서의 혁명” 등 세가지 영향 아래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지은이의 시각은 기본적으로 근대주의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 새로운 현상에서도 민족과 인종적 민족 사이의 연속성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초기 근대 국가는 일정한 영토 안에서 법과 시민권을 기초로 만들어진 공동체를 추구하며 형성되었는데, 그 같은 ‘시민적-영토적’ 민족은 정치적, 경제적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 공동체이기도 해야 했다. 이는 신화와 상징, 가치를 젖줄로 삼는 인종적 민족의 통합 기능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근대의 시민적 민족은 인종적 민족의 감정을 초월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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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국민적 영웅 잔다르크의 모습. 앤서니 스미스는 근대의 ‘민족’ 개념이 전근대 ‘인종적 민족’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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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근대를 낳은 혁명은 매우 불연속적이었기 때문에 근대 민족은 양과 형식에서 서로 차이를 드러내며 형성되어갔다. 여기서 ‘시민적-영토적’ 경로와는 다른, ‘인종적-계보적’ 민족 형성의 경로도 나타났다. 유럽의 중심이 아닌 곳에서, 이들의 민족 형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신의 민족을 형성하기 위해 신화와 공동의 상징, 가치 등 인종적 민족 개념에 더 강하게 호소하는 경로가 나타난 것이다. 이 두가지 길에서 “민족은 점진적으로 혹은 불연속적으로 이전의 인종적 민족과 그 유대의 기초 위에서 형성되었고, 민족의 형성은 동원, 영토화, 정치화 과정을 통해 인종적 민족의 유대와 감정을 민족적 유대와 감정으로 ‘변형’하는 문제가 되었다.” 결국 근대 민족은 인종적 민족의 기초 위에 만들어진 셈이다.

인종적 민족이란 개념에서 도저히 탈피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면 끝없는 갈등만이 남게 될까? 미래에 대한 섣부른 전망보다도, 지은이의 제안처럼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것이 우선인 듯하다. “인종적 민족의 정체성을 밑에서 받쳐주는 신화, 기억, 상징의 내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들의 힘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근대 세계에서 국가와 개인 사이의 관계를 혼란시키는 인종적 민족의 적대를 파악할 수 없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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