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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재물이란 쌓였다가도 줄어드는 것이 천하의 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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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조선 후기 단편모음 ‘이조한문단편집’

부자 주인 훈계하는 도둑 무리 대장

과거제 혼탁, 도망노비의 반항도 그려



한겨레

이조한문단편집 1~4
이우성·임형택 편역/창비·각 권 3만원


“재물이란 천하에 공변된 것이지요. 재물을 쌓아두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쓰는 사람이 있고,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는 사람도 생기는 법이라. 주인 같은 분은 쌓아두는 사람이요 지키는 사람이라면, 나 같은 사람은 쓰는 사람이요 가져가는 사람이라 할 터이지요. 줄어들고 자라나는 이치와 차고 기우는 변화는 곧 조화의 상도(常道)라. 주인장 역시 한낱 이런 조화 중에 기생하는 것에 불과하지요.”

영남의 한 부잣집을 덮친 도적 무리〔群盜〕의 두령이 주인에게 들려주는 재물에 관한 생각이다. 일월영측의 ‘상도’까지 거론하며 사뭇 근엄하게 설파하는 이치가 그럴듯하다. 겁을 먹은 주인이 순순히 재물을 내주는 듯하다가 뒤로는 종들을 규합해 도적 무리에 맞서려다 들켜서는 호되게 당하는데, 그 당한 모양을 묘사한 대목이 이러하다.

“눈이 빠진 놈, 팔목이 부러진 놈, 코피가 터진 놈, 뒤통수가 깨진 놈, 옆구리가 접질린 놈, 이가 빠진 놈, 귀가 떨어진 놈, 뺨이 팅팅 부은 놈, 이마가 부서진 놈, 발을 저는 놈, 뼈가 부러진 놈, 살가죽이 터진 놈, 숨을 헐떡이는 놈, 놀라 숨이 막힌 놈, 눈만 멀뚱멀뚱 넋이 달아난 놈, 쓰러져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놈, 그야말로 형형색색 구구각각으로 다치지 않고 성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아주 죽도록 된 자는 하나도 없었다.”

다친 이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자못 흥에 겨워 열거하는 부상의 유형 묘사가 판소리 사설이나 김지하의 담시를 연상시킬 정도로 익살맞다. 19세기 한문 단편집 <청구야담>에 실린 ‘군도 대장이 불어남과 줄어듦의 이치를 말하여 부호를 설득하다’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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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한문단편집>은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급격한 사회 변동이 일어나던 18, 19세기 조선의 사회상을 담은 한문 단편들을 주제별로 모아 엮었다. 그림은 김홍도 작품으로 전해지는 <연광정연회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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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자 이우성과 임형택이 편역한 <이조한문단편집>은 이 작품을 포함해 18세기 이후 조선 후기의 한문 단편들을 주제별로 분류해 모은 책이다. 1973년에 1권이, 1978년에 2·3권이 나왔던 이 책은 당대 사회상과 풍속사를 실감나게 담아서 <장길산>과 <객주> 같은 대하소설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우성(1925~2017) 선생이 지난해 타계한 가운데, 한문 원문을 담은 제4권을 포함해 모두 4권으로 새롭게 나온 <이조한문단편집>은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지난 5년여 젊은 연구자들과 독회를 한 결과다. ‘부’, ‘성과 정’, ‘세태1: 신분 동향’, ‘세태 2: 시정 주변’, ‘민중 기질 1: 저항과 좌절’, ‘민중 기질 2: 풍자와 골계’ 여섯 갈래로 작품을 나누어 싣고 편마다 해설을 곁들였다. 젊은 언어 감각으로 번역문을 다듬었고, 초판에서 부실했던 작품별 지은이와 출처 확인에도 지난 40여년의 연구 성과를 반영했다.

가난에 떠밀려 글공부를 작파한 선비가 장사와 길쌈도 마다 않고 10년 동안 끼니를 죽으로 때우며 악착같이 재산을 모은 사연(‘광작’), 남들이 과거에 제출했던 글을 이것저것 짜깁기한 답안으로 과거에 급제한 선비(‘교생과 수재’), 도망 노비를 잡으러 갔다가 봉변을 당할 위기에 놓이는 양반들(‘휘흠돈’, ‘새벽’), 대신 매를 맞는 일로 생계를 꾸리다가 결국 변을 당한 매품팔이(‘매품’), 군악대의 이름난 악장과 기생들을 불러 연회를 벌일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거지 대장(‘꼭지딴’) 등의 이야기는 기존의 신분제와 계급질서가 흔들리고 재편되는 급격한 사회 변동의 다양한 면모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낡고 지루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현대적 감각의 상황과 문장이 읽는 맛을 준다. 평안도 강계 은광에서 은덩이를 훔치는 무뢰한을 묘사한 성대중 작 <청성잡기> 중 ‘광산촌’의 한 대목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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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택 교수.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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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을 따라 뱀처럼 기어 은을 캐내는 장소에 다다른다. 커다란 은덩어리가 망치에 맞아 쪼개진다. 그자는 날쌔게 은 한 덩이를 끌어안고 죽어도 놓지 않는다. 욕설과 채찍을 엿처럼 달게 여긴다. 지키는 사람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먹고 떨어지라고 밀어내고 만다.”

편역자 임형택 교수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18, 19세기 조선 사회는 상업과 교역이 활발해지고 계층이 분화하면서 소설이 발달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춘 ‘소설 시대’였다”며 “조상들 삶의 다양성과 구체성을 지닌 이야기들이 소설과 영화, 드라마 등으로 창조적 변용을 일으킬 여지가 풍부하다”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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