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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창녀처럼 화장했네’ 말할 땐 언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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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0교시 페미니즘

다들 내 얼굴에 참 관심이 많았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바른, 색 있는 립밤을, 평소 내 이름도 몰라 번호로 부르던 선생님은 금방 알아차렸다. “어디 가서 몸 팔려고 그딴 걸 바르냐”는 말이 돌아왔다. 화가 나서 화장을 시작했다가 점점 멈출 수 없게 되었다. 화장 안 한 내 얼굴을 견딜 수 없었다. 화장품 때문에 상한 피부에 여드름이 나면 그게 창피해서 화장품을 덧발랐다. 그걸 들킬 때마다 나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말들이 돌아왔다. 버스에서 같은 학교 교복 입은 남학생에게 성추행당했을 때 교사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건, 그 말들 덕분이었다. “창녀처럼 몸 팔려고….”

20살을 전후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갑자기 모든 사람이 화장하지 않는 내 얼굴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교수로부터 여자의 화장은 ‘예의’라는 말을 들었다. 이 말과 ‘창녀처럼 화장했다’가 사실은 같은 소리라는 걸 이젠 안다. 사회는 여성에게 자신의 얼굴을, 몸을 마음대로 할 권리를 주려고 하지 않는다.

새 학년 규칙을 정할 때 늘 논쟁거리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화장 관련 문제다. 화장을 주제로 ‘자유로운 개성의 표현’이라는 쪽과 ‘학업에 방해되고 건강에도 좋지 않으며, 성폭행 위험도 있으니 학생다운 모습으로 다녀야 한다’는 의견이 맞선다. 이럴 때 나는 일단 화장하는 것과 성폭행 사이에는 관계가 없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한다. “왜 남학생들은 화장을 하지 않을까?” 이어 자신의 외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질문하면 참 놀랍고 부러운 결과를 볼 수 있다. 남학생들은 자기 외모에 별 불만이 없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외모가 못 봐줄 정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질문에 손을 든 여학생은 그 근거로 ‘나는 돼지 같다’는 말을 하는데, 비슷한 키와 몸무게의 남학생은 자신이 썩 잘생겼다고 말한다. 성별에 따른 이런 자존감의 차이를 단순히 ‘여자애라 외모에 관심이 많아서’란 말로 넘어가도 되는 걸까?

나는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화장할 자유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룰 수 없는 세세한 외모 기준을 세워두고 그 기준에 고통받는 여성 청소년들을 마치 자유처럼 포장된 ‘자기 관리’의 레이스에 몰아넣고 싶지도 않다. 화장할 자유가 있으려면, 당연히 화장하지 말아야 할 자유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화장해서라도 스스로 꾸미지 않으면 못 봐줄 정도라고 여기는 여학생이 절반을 넘는 교실에서, 여학생들의 화장을 ‘창녀 같다’고 꾸중하는 동시에 성인이 되자마자 ‘예의’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그 자유는 너무 먼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바라는 건 여성이, 청소년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할지를 규칙으로 정하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아예 의제에 오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덧붙여 안경 쓴 여성조차 보기 힘든 미디어를 보유한 사회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주체로서 롤모델이 되기로 했다. 이런 여성들이 텔레비전에 잔뜩 등장하는 그날까지 “선생님은 여러분 앞에서 화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나의 화장할 자유를 위해서라도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서한솔(서울 상천초등학교 교사, 초등성평등연구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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