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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8 (월)

‘그림 장기수’ 모내기…여전히 풀려나지 못한 고향 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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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00℃] 그림 ‘모내기’의 앞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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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친북 이적 표현물로 지목돼 검찰에 몰수된 뒤 1월26일 서울중앙지검 검찰 창고에서 29년 만에 나와 국립현대미술관에 인계된 유화 <모내기>의 신학철 작가가 6일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자택 작업실에서 <모내기>의 밑자료가 됐던 사진과 자료가 든 파일을 보여주면서 작업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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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몰랐다. 상상하지도 못했다.

1977년 유신시절 나온 ‘새마을운동’ 화보집과 꿈결 같은 고향 경북 김천 오성마을의 모내기 풍경을 찍은 사진들에서 소재를 길어올리고 영감을 받은 그림이었다. 남북이 통일된 대동세상의 이상향으로 푸른 보리밭, 살구나무 어우러진 고향 마을 풍경을 옮겨놓기도 했다. 이런 작품이 30년 가까이 국가보안법에 얽힌 ‘그림 장기수’ 신세가 될 줄이야.

신학철 작가 87년 통일미술전 위해
경북 김천의 농촌풍경 화폭에 담아
“평양이라던 풍경, 새마을운동 모습
소 옆의 인물도 8촌 형님 그대로”


89년 이적표현물 낙인 ‘29년 징역’
지난달에야 겨우 검찰창고서 나와


미술관 관리받게 됐다지만 여전히 몰수품
‘작품 사면’ 법리적 주장 어려워
대법 판결 재심·당국 결정이 해법
법조계 “특별 입법 등 반환여건 필요”


훼손된 그림, 복원·유지도 관건
신 작가 “크게 새로 그릴 생각도”


북한을 찬양 고무하는 이적 표현물 굴레를 쓰고 29년째 검찰 압수물 창고에 갇혀 있다가 지난달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수장고로 옮겨진 그림 <모내기>에 대해 작가 신학철(75)씨는 “여전히 황당하다”면서 회한 어린 탄식을 내뱉었다. 지난 6일 서울 장안동의 자택 작업실에서 작가는 어제 일처럼 30여년 전 그림을 그렸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70년대 전위미술운동에 가담했고, 80년대 초엔 회오리 형상에 우리 근대사의 비극적 장면들을 모자이크처럼 수놓은 대작 <한국근대사> 연작을 내놓으며 큰 주목을 받은 작가는 87년 <모내기>를 그릴 당시 44살의 서울 남강고 미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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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인계된 <모내기> 원화. 화폭 위쪽 백두산 천지 아래에서 잔치를 하는 민중의 모습과 가운데 모내기 장면을 그린 부분 등의 물감층이 떨어져 허연 공백이 드러나 보인다. 그림을 접어 오랫동안 방치하면서 생긴 훼손이라고 신학철 작가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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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여름 진보 미술인들이 결성한 민미협(민족미술인협회)의 1회 통일미술전에 출품하라고 해서 구상했던 작품이에요. 출품 독촉이 심했는데 학교 일 때문에 결국 그해 못 냈어요. 회장인 손장섭 작가한테 얼마나 구박을 받았는지. 그래서 해를 넘겨 87년 통일전에 내게 된 겁니다.”

작가는 통일을 반대하는 외세 매판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엔 시위 현장의 탈춤패가 반통일 세력을 몰아내는 그림을 떠올렸다. 판에 박힌 구도 같아서 그림 이야기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작업실에 모아놓은 수집사진들 목록을 뒤척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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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유신시대 정부에서 간행한 새마을운동 화보 사진. 남강고 교사시절 학교에 수시로 배달되었던 이 화보집의 사진도 신 작가는 <모내기>의 주요 배경으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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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사진들을 분류해놓은 봉투 안에서 80년대 초 고향인 김천 오성마을의 모내기, 써레질하는 사진들이 나왔어요. 성묘 가면서 찍은 건데, 주요 장면들을 그림에 옮겨서 써레질로 외세와 반통일 세력들을 쓸어버리는 모습으로 담아보자는 영감이 퍼뜩 스쳐갔지요. 그다음부터 고향 농촌을 무대 삼은 통일 이야기가 술술 풀렸죠. 법 없이 살던 옛 고향마을의 보리밭, 살구나무 초가 풍경도 배경으로 넣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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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작가는 <모내기>의 주요 배경으로 80년대 초 고향(경북 김천)에 성묘하러 갔다가 찍은 사진들 속 농촌과 농부들 모습을 끌어내어 썼다. 당시 소가 써레질하는 모습을 찍은 이 사진은 <모내기>의 핵심적인 장면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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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 아래 민중들의 잔치 모습과 농민들이 외세를 상징하는 코카콜라 등을 써레로 쓸어버리는 장면이 어우러진 유화 <모내기>는 이렇게 탄생했다. 그림의 도상들은 대부분 그가 찍거나 모은 사진들 속에서 따온 것들이었다. 작가는 그림 소재로 쓴 사진들을 서재에서 가져와 일일이 짚어 보여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가장 크게 그려진 농부와 소의 써레질 풍경은 80년대 초 고향의 써레질 사진을 그대로 옮겨 그린 겁니다. 89년 검경이 그림을 이적표현물로 압수할 당시 평양 만경대라고 판독했던 잔치 풍경은 아이러니하게도 1977년 새마을운동 화보집에 나온 들녘 농민들의 대화 사진들이 소재가 됐지요. 북한 선전 화보와 비슷한 장면이라는 게 걸린 것 같기도 하고… 써레질하는 소 옆에 서 있는 인물은 8촌 형님인데, 역시 제 사진 속 모습대로 등장합니다. 화폭 맨 위 백두산 풍경은 직장이던 남강고 현관에 걸려 있던 복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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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에 등장하는 신 작가의 8촌형님. 십여년 전 타계해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80년대 초 삽 들고 찍은 그의 전신상을 신 작가는 그림 속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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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는 87년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된 뒤 한달여간 전국 순회전을 벌였다. 경찰은 제주 전시 때 광주 작가 이상호, 손민호씨의 민중투쟁도를 압수하긴 했지만, <모내기>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전시 뒤엔 작업실에 2년간 보관됐고, 1989년 7월엔 한 경제지 특집기사에 작가의 대표작으로 대문짝만하게 도판까지 실렸던 <모내기>의 수난이 시작된 것은 89년 8월17일 새벽이었다. 막 잠을 깬 작가는 문을 두들기고 들어온 서울시경 대공분실 형사들에게 연행됐고, <모내기> 등 소장 그림과 책들은 줄줄이 압수당했다.

“민미협에서 89년 달력을 펴내면서 7월 삽화에 <모내기>를 넣었는데, 인천 청년단체에서 달력 그림을 인쇄한 부채를 만들어 팔려던 것을 이적표현물로 문제 삼은 겁니다. 그림을 부채에 인쇄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신고했던 것 같아요. 북한 공작원 출신으로 전향해 시경 직원으로 일한 이가 이적표현물 판정을 내렸지요.”

지금 자택 근처 장안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은 뒤 서초동 서울지검 조사실로 다시 불려갔다. “대여섯명의 검사들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모내기> 주위에 서 있었고, 그중 한 검사가 발로 그림 끝을 밟으면서 ‘이게 당신 그림이냐’고 묻더군요. ‘내 그림 맞다, 왜 밟느냐’고 대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석달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지만 이후 10년간의 험난한 재판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찰은 ‘공안비평’ 신조어를 만들면서 <모내기>가 한반도 남북한 실상을 묘사한 것으로 화폭 상단의 북한 쪽에는 만경대를 배경으로 평화롭게 잔치하는 모습을 미화하고, 아래는 남한의 실상을 쓰레기처럼 부정적인 내용으로 채웠다는 억지주장을 내놓았다. 90년, 92년 1·2심 재판부는 “북한 동조 목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으나, 6년 뒤 뜻밖에도 대법원은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며 사건을 서울지법으로 되돌려보냈고, 99년 8월 작가의 유죄(선고유예)와 그림의 이적표현물 판결이 확정됐다. 작가는 “대법원 판사들이 검사의 일방적 설명을 들으며 압수된 그림을 실견한 뒤 내린 판결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고 했다.

2000년 8월 그는 김대중 정부의 특별사면을 받은 뒤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소하며 작품 반환 운동을 벌였다. 유엔 인권이사회도 2004년 작품 반환과 보상 등을 권고했지만, 검찰은 몰수품 영구보존 조치를 취한 것 외에는 법적 방도가 없다며 작품을 내주지 않았다.

10여년이 지나고 지난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작가는 반환청구 민원을 냈고, 문화체육관광부와 법무부 협의 끝에 <모내기>는 지난달 26일 압수된 지 29년 만에 검찰 창고를 벗어나 보존 환경이 완비된 미술관 미술은행 수장고에 들어가게 됐다. 지난달 29일 신 작가는 미술관을 찾아가 30여분간 원화를 봤다. 2000년 검찰에서 다른 압수품을 돌려받을 때 흘깃 본 뒤로 18년 만의 만남이었다. 종이상자에 말린 채 들어 있다가 펼쳐진 그림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동안 접어 봉투에 보관해온 탓에 화폭 여기저기 물감 떨어진 자국이 십자줄처럼 보였다. “서툴게 그리지 않았나 싶어 걱정했는데,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그렸다는 느낌이어서 안도감부터 들었어요. 지금 언론에 나오는 <모내기> 도판은 대부분 원화가 아니라 압수 뒤 그린 재현품이에요. 화폭 상단에 새들의 둥지가 그려졌지만, 원화는 그게 없고 주위를 둘러싼 꽃풀들의 표현도 간략해요. 구도나 색감이 약간 미숙한 처음 도상들을 다시 살펴보니 반갑기도 했고요. 이제 보존 관리를 받게된 만큼 앞으로 작품 반환과 대중 전시를 목표로 삼으려 합니다.”

작가는 자유로운 몸이 됐는데, 작품은 여전히 죄수로 규정된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표현의 자유와 결부된 국가기관의 이적표현물 판정과 관련해 작가 아닌 작품의 사면은 국내외 마땅한 전례가 없다. 법무부는 연말 박상기 장관이 밝힌 대로 이적표현물 확정 판결이 난 상태에서 풀어야 할 방법이 없다는 입장이다. 열악한 관리 여건 문제를 풀기 위해 미술관으로 보관처를 옮긴 게 현재로선 최선의 조치라는 논리로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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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통일미술전에 전시됐던 <모내기> 원작이 실린 순천대 신문. 왼쪽은 부분 수정해 다시 그린 1993년 작 <모내기>가 실린 서울여대 학보.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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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계에서는 대법원 판결의 재심 또는 당국의 정치적 결단으로 반환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견해가 나온다. 재심의 경우 판결이 잘못된 근거로 나왔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모내기>는 사법부가 주관적 잣대 아래 내린 판결이므로 객관적으로 뒤집을 물증을 제시하기가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모내기> 재판 당시 신 작가를 변호했던 조용환 변호사는 “작가가 사면되긴 했으나 유죄 판결이 사라진 것은 아니므로 반환을 법리적으로 주장하기가 마땅치 않다”며 “작품이 몰수돼 국가 소유가 된 만큼 미술관에 기증하는 방식으로 결단할 수도 있겠으나, 현재 정치적 상황에서 가능할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김준현 변호사는 “과거 낡은 이념적 잣대로 판결을 내린 것이 분명한 만큼 시간이 걸리더라도 예술품의 경우 재심 사유를 완화하는 특별 입법 등을 통해 반환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미술계에서는 훼손된 <모내기>를 복원할 것인지, 지금 상태대로 유지할 것인지에 관심이 쏠린다. 신 작가와 지인들은 작품이 반환될 경우, 훼손된 상태대로 공개하는 주제전시를 하는 쪽으로 의견은 모았으나, 그 뒤 복원할지는 입장을 정하지 않았다. 신 작가는 “국가폭력의 역사적 증거물로서 남기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한 작품에 대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도 든다”며 “원래 밑그림 자료를 토대로 원화보다 훨씬 큰 <모내기> 대작을 그릴 생각”이라고 했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대형 전시와 정밀촬영 등의 기록 뒤 복원하는 안, 훼손된 작품 자체를 복제품으로 남겨놓고 원작은 복원하는 안, 훼손 및 복원 과정 자체를 전시와 기록으로 남기는 안 등 여러 의견이 나오고 있다. 진보예술인단체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은 이와 관련해 올봄 <모내기> 반환의 법적 쟁점과 보존, 활용 방안 등을 놓고 전문가들의 심포지엄과 공청회 등을 준비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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