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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고통 이기게 하는 힘은 사람, 적당히 거리둬야 오래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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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병 투병 김혜남 전문의…3년간 쓴 ‘당신과 나 사이’ 출간

동아일보

파킨슨병을 앓으며 관계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는 김혜남 씨. 투병 생활 중에도 그는 하루 한 잔 직접 내린 커피를 마시고, 만남을 마다하지 않으며 충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제게 정말 좋은 원두가 많은데 한 잔 드릴까요?”

동아일보

서울 강남구 자택에서 13일 만난 김혜남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59)의 작업실 한편에는 10여 가지 원두가 산지별로 진열돼 있었다. 김 씨는 “볼리비아 게이샤가 좋겠다”고 했다.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는 파킨슨병 투병 중 인간관계를 다룬 일곱 번째 책 ‘당신과 나 사이’(메이븐·사진)를 냈다. 1시간 글을 쓰면 2시간 동안 꼼짝 없이 누워 있어야 하는 상태로 3년간 쓴 책이다.

마흔 즈음 병을 앓아 벌써 17년째. 한 시간 반 간격으로 약을 먹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데,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원두를 꺼내고 생수통을 드는 게 모두 도전이다. 그래도 “전문가가 해야 맛이 난다”며 한사코 직접 커피를 내렸다. 그는 “아픈 뒤 커피를 즐기게 됐는데 뭐든 끝까지 하는 성격 탓에 커피도 그렇게 공부했다”고 했다. 그의 추천대로 벌꿀 같은 향긋한 신맛이 산뜻하게 감겼다.

그가 책을 쓴 건 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이었다. 국립정신건강센터의 ‘잘나가는 전문의’였던 그는 아프기 전까지 “내가 잘나서 주변에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낯을 가리는 편이라 차갑다는 오해도 받았다. 하지만 병을 앓은 후 손 하나 꼼짝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인간은 혼자임을 깨달았다. 고통을 이기는 유일한 힘이 사람들의 온기, 관심이었단 것도. 그는 “뒤늦게 깨달은 소중한 관계를 지키는 방법에 대해 말하려다 보니 ‘거리 두기’가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물리적으로 가족, 연인은 사랑과 보호가 이뤄지는 0∼46cm를 유지하는 게 좋다. 친구와는 친밀함과 격식이 공존하는 46cm∼1.2m, 공적인 관계는 1.2∼3.6m가 이상적이라고 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극복하는 건 부모를 한 인간으로 인정하고 거리를 두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직장동료도 친구나 가족이 아니라 ‘동료’일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부부싸움을 하면 남편은 ‘당신 책처럼만 하라’고 한다. 왜 책과 실제가 다르냐고. 하지만 인간관계를 잘 맺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하고 싶기 때문에 쓴 것”이라며 웃었다. 병원장의 괴롭힘 등 직접 겪은 사례들이 설득력을 더한다.

그는 벌써 다음 책을 준비 중이다.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해 병이 악화돼 6차례 입원했는데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고 했다. 타인과 절대 나눌 수 없는 것이 고통임을 절감했다는 것.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커피를 내려줄 때처럼 떨리는 손으로, 하지만 최선을 다해 기자가 가져간 새 책에 서명했다. 그는 “이제 누구도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럴 자격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과 편안한 거리감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편안하고 따뜻했던 그와의 시간을 떠올리자,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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