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프파이프 金 클로이 김 아버지 김종진 씨
너무 기뻐도 눈물이 난다. 다른 가족은 모두 울 정도로 기쁜데 클로이 김의 아버지 김종진 씨(62)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흐뭇한 미소만 지었다. 한국을 떠난 지 36년 만에 모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딸의 금메달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김 씨를 미국 대표팀이 머물고 있는 평창 아이원리조트에서 만났다. 지난 36년간의 타국살이, 딸을 올림픽 설상 종목 최연소 챔피언으로 등극시키기까지의 애환을 들을 수 있었다.
―눈물이 정말 한 방울도 안 나던가요.
“흘리고 싶어도 시간이 없었어요(웃음). 우리 애가 열세 살 때 처음 미국 대표팀으로 선발됐을 당시에는 눈물이 나더라고요. 내가 처음 미국에서 살면서 온갖 잡일을 다 하면서 무시를 당했던 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사실 그땐 미국 국가대표가 대단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되니까 일단 6000달러를 내래요. 대표팀은 루키와 프로 두 팀으로 나눠지는데 첫해를 보내는 루키 팀은 모든 경비를 개인이 낸다고 하더라고요. 냈죠 뭐, 허허.”
―금메달 확정 순간 그간의 설움이 스쳐 지나갔다고 했는데….
“제가 미국에서 온갖 고생 끝에 제대로 자리 잡은 게 작은 공장에서 중간관리자 일을 한 거였어요. 공장에서 일하는 덩치 좋은 사내들한테 내가 엔지니어랍시고 ‘하이∼’ 하고 인사하면 본 척도 안 했어요. 저 쪼그마한 게 왜 와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나 이런 식으로 대했어요. 현장에서 오래 일한 그들은 무척 거칠었죠. 그런데 저도 막일을 해봤던 사람이라 용접이고 뭐고 다 할 줄 알잖아요. 직접 하면서 이렇게 하면 된다고 보여주니 인정을 해주더군요. 제가 그 회사 5년쯤 다니다 스위스에서 여행사를 차리려고 관뒀는데 그때 사장이 ‘너 같은 한국 사람 한 명 더 데려다 놓고 가라’고 부탁을 하더라고요.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다른 게 아니라 돈을 더 주니까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죠. 토요일에도 나가서 일했어요. 수당 받으면 임금이 더블인데 ‘와이낫’이에요(웃음).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클로이가 보드를 잘 타면서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인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줘서 참 의미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다들 우리가 한국인인 거 알거든요.”
클로이 김은 매년 미국 ‘아버지의 날’이나 아버지 김종진 씨의 생일이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아버지와 함께 찍은 어린 시절 사진을 올리며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을 표시한다. 사진 출처 클로이 김 인스타그램 |
―너무 일찍 인생의 꿈을 이룬 막내딸이 걱정은 안 되는지….
“저도 애도 운동만으로 인생을 끝까지 산다는 생각은 안 해요. 미국 시스템 자체가 체대도 없고 운동 잘한다고 학교 안 가도 점수 주는 시스템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공부도 똑같이 하면서 오히려 고교를 1년 일찍 끝냈어요. 힘들다고 울 때마다 ‘디스 이즈 더 로(This is the law)!’라고 좀 무섭게 몰아붙였어요. 대회 때문에 원정 갈 때도 인터넷으로 수업을 다 들었어요. 제가 공대를 나와서 고교 수학 정도는 알아요. 미적분이나 화학, 물리, 통계 같은 건 제가 예습을 미리 다 하고 클로이가 모르는 거 있으면 가르쳐 줬어요. 예순 넘어서 공부하느라 고생 좀 했죠(웃음). 재작년 뉴질랜드 하계훈련 때 숙소 식탁에서 같이 공부를 많이 했는데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나는 네 아버지니까 공부 포기 못 한다. 널 바보로 만들기 싫다’며 심하게 싸우면서 공부 시켰어요. 작년 훈련 때도 같은 집을 얻어서 갔는데 그 식탁을 보더니 애가 ‘아이 헤이트 디스(I hate this)!’ 이러더라고요. 결국 작년에 고3 과정 다 끝내고 마음 편히 올림픽 준비를 할 수 있었어요. 대학 입학 인터뷰도 몇 개 봤고요.”
―한국 부모의 ‘고3 수험생 스트레스’를 똑같이 겪었네요.
“강남 돼지엄마 아시죠? 저도 몇 년 전에 뉴스로 보고 ‘참 극성이다’ 생각했는데 저도 막상 아빠가 되니 한국 부모님들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자식이 하고픈 일이라면 공부고 운동이고 열정적으로 돕게 되더라고요. 사실 저는 고등학생 때 공부를 열심히 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평창 금메달까지 달려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애가 크면서 멋도 부리고 신체 변화도 생기고 어렸을 때와는 달리 겁도 점점 많아지고 루즈해지더라고요. 한번 앉혀놓고 얘기를 했죠. ‘아빠는 어릴 때 생각 없이 살았고 참 어리석었다. 너는 천재도 아니고 타고난 것도 아니다. 겸손해야 한다. 너는 지금 사람들이 알아봐 주지 않냐. 아빠는 인생에 그런 찬스가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다. 넌 지금 수천만분의 1의 기회 중 한 번을 얻은 거다. 네가 겸손하지 않아서 이번의 찬스를 놓친다면 평생 후회할 거다’라고…. 남들이 보면 늘 잘하는 것 같지만 힘든 일이 왜 없었겠어요. 수도 없죠. 어릴 때 잘하면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거든요. 요즘에는 스스로가 알아요. 자기 인생 좋다고, 이 기회 놓치고 싶지 않다고요.”
―달랑 800달러를 들고 이민 가신 스토리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제가 군대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일본에서 비즈니스를 하셨는데 어머니랑 그걸 정리하러 가서 다다미방에 혼자 앉아있는데 문득 ‘아, 나는 이제 내 힘으로 혼자 살아야 되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좀 바뀌었어요. 내가 남들보다 키가 작은 것도 아니고 다행히 부모가 고등학교, 대학까지 다니게 해줬고 군대도 갔다 왔고, 아직 젊고, 못할 게 뭐 있나 싶더라고요.”
―공장에 취직해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은….
“미국에 가자마자 500달러짜리 차를 하나 샀어요. 한 달에 180달러짜리 방도 구했고. 가고 싶은 데 갈 수 있는 차도 있고 추우면 들어갈 집도 있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제일 먼저 한인신문 보고 햄버거 집에 일을 하러 갔어요. 그런데 그간 술만 먹고 담배 피우고 했던 사람이 일할 줄 알겠어요? 쉬는 시간에 구석에서 담배 피우고 그랬더니 그날 바로 잘렸죠.
주유소 일도 했고 이것저것 해보다 공부는 하기 싫고 공장에 들어가서 돈을 좀 모아 장사를 해볼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거기 다니면서 다시 학교 다닐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장사를 하려니 5만 달러는 있어야겠더라고요. 그때 내 나이가 스물아홉쯤 됐는데 2, 3년 죽도록 고생하다 망하면 그때는 육체노동 하는 직장 잡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 차라리 기술을 배우자고 생각해서 일하면서 2년제 대학을 다녔어요. 정말 바닥 일을 했지만 저는 제가 젊었을 때 공부를 열심히 안 했기 때문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열심히 주어진 환경에서 잘하면 되잖아요. 열심히 해봐서 안 되면 그때 포기하면 그만이지, 남을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졸업할 때 되니 성적이 꽤 잘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4년제로 편입을 했어요. 나중에는 공장 사무실에서 엔지니어 일을 할 수 있게 됐어요.”
―클로이가 외할머니를 보고 결선 3차 시기에서 더 힘을 냈다고 했는데….
“이번에 장모님 뵈니까 키가 많이 작아지셨더라고요. 애도 느꼈을 거예요. 할머니가 늙어 가시는 걸. 또 저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효도도 한번 제대로 못하고 용돈 한번 못 드렸죠. 살아계시면 좋은 것도 해드리고 자식 자랑 한 번 하셨을 텐데. 제가 나이를 많이 먹고 열심히 살기 시작하니, 그게 항상 한이 돼서 아내한테 그런 얘기 많이 해요. ‘당신 어머니는 딸들이 다 보살펴 드리니까 좋으시겠다’고요. 딸애가 그런 걸 듣고 할머니한테 애틋한 게 있는 거 같아요. 한국 오면 꼭 할머니 만나고.”
―클로이의 다음 시즌은….
“이제부터는 클로이가 혼자 다녀야죠. 그간 모두가 열심히 도와서 잘할 수 있었던 거지, 네가 남보다 재능이 있고 천재라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넌 평범한 애니 진짜 재능이 있다면 이제 혼자 증명해 보라고 했어요. ‘단, 그래도 난 네 아빠니까 늘 너를 도울 거다. 그래도 이제 18세 성인 됐으니까 한번 해보라’고 했어요. 그래야 남자친구도 사귀고 그러겠죠(웃음).”
평창=임보미 기자 b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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