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
1908년 4월 영국 자유당 정부의 상무장관으로 첫 각료직을 시작할 당시, 33세의 윈스턴 처칠은 ‘진보적 자유무역주의자’였다. 보수당의 보호무역주의에 반대해 자유당으로 옮긴 그는 ‘사회 개혁가’로 불릴 만큼 진보적인 노동정책 입법에 나선다. 노동자의 소득 안정을 위해 영국판 노사정협의체를 만들고, 일자리 확보를 돕는 직업소개소를 만드는 것 등이다.
이런 정책엔 예산이 필요했다. 하지만 레지널드 매케나 해군장관은 사회복지보다 독일의 해군력 증강에 대비한 군비를 증강할 때라며 번번이 방해했다. 화가 난 처칠은 그해 8월 15일 유명한 ‘스완지 연설’을 통해 “영국과 독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믿음을 퍼뜨리는 이들은 욕을 먹어야 한다”며 “양국 간엔 이익 충돌이 없다”고 반박했다.
1910년 내무장관을 거친 처칠은 다음 해 해군장관이 되어서야 매케나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고 마음을 바꾼다. 매케나의 후예가 되겠다고 다짐한 그는 해군 조직을 정비하고 전함 등 전투력을 증강하는 데 전력했다. 과거의 자신처럼 사회복지를 명분으로 뒷다리를 거는 동료 의원들에게 “당장 사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일쑤였다.
지난해부터 매월 셋째 토요일 오후 4시에 처칠의 전기를 강독하는 ‘셋토네’ 심포지엄을 진행하고 있는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는 “처칠의 현명한 정치적 표변 덕분에 영국은 1차 세계대전(1914∼1918년)에서 독일 해군을 물리칠 준비를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원래 자리가 바뀌면 말이 달라지는 법이지만 처칠은 영국의 안보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도덕적인 비난을 감수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 비시 정부가 1940년 6월 자신의 만류에도 히틀러에게 함대를 넘겨주기로 결정하자 격침을 단행했다. 프랑스 해군 1200명의 생명을 앗았지만 옛 친구가 영국에 함포를 들이대는 비극을 막았다.
같은 해 11월 독일군이 영국 코번트리시를 폭격할 것이라는 암호를 해독했지만 시민 희생을 각오하고 공습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독일군의 암호를 풀 수 있다는 비밀을 숨기는 게 국익에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처칠에게 ‘가장 암울한 시절’이었던 당시 대다수 영국인들은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고전적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의 태두인 한스 모겐소는 ‘국가 간의 정치학’에서 “동기는 개인과 국가의 권력 강화라는 편협한 것이었으나 외교정책은 전임자들보다 도덕적 정치적으로 나았다”고 평가했다. 전임 총리 네빌 체임벌린이 아돌프 히틀러에 유화정책을 편 것은 “도덕적으로 나았을지 몰라도 수백만 인류에게 유례없는 재앙을 가져왔다”고 갈파하면서.
처칠은 1950년 12월 하원에서 “유화정책 자체는 좋은 것일 수도 나쁜 것일 수도 있다”며 “국력이 약하거나 공포 때문이라면 소용도 없고 오히려 치명적이다. 하지만 강한 힘이 뒷받침된다면 관대하고 고상하며, 평화를 위한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라고 정의했다.
처칠이 살아있다면 최근 문재인 정부의 대북 유화정책에 박수를 보낼 듯하다. 겹겹이 제재에 달러가 마른 북한의 궁핍한 상황을 이용해 ‘관대하고 고상하게’ 개혁개방과 비핵화를 이끌어 낼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다만 강한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단서를 잊지 말아야 한다. 김정은은 새해 매력 공세가 먹히지 않으면 다시 군사모험주의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다. 다시 우리를 조롱할 경우 미국도 모르게 ‘코피 작전’보다 더한 군사적 응징에 나설 수 있음을 말과 행동으로 주지시킨 뒤 필요할 경우 실행할 결기를 다져야 할 때다. 국가안보를 위한 지도자의 표변은 무죄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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