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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일)

“이런 값진 봉사 언제 또 해볼까요” 연휴 잊고도 싱글벙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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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성공올림픽 이끄는 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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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처음으로 시댁에서 차례상을 차리지 않고 평창을 지켰다는 주부 자원봉사자 김재영 씨. 평창=장승윤 tomato99@donga.com


주부 김재영 씨(55)는 이번 설날에 차례상을 차리지 않았다. 아예 시댁에도 가지 않았다. 30년 넘은 결혼생활 중 처음이다. 그 대신 김 씨는 설 연휴 내내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평창에 있었다. 썰매 경기가 열리는 슬라이딩센터에서 관람객 안내를 맡았다. 그는 평창 겨울올림픽 자원봉사자 1만5656명 중 한 명이다.

평창 올림픽이 반환점을 돌면서 자원봉사자들이 주목받고 있다. 이번 올림픽이 여러 우려를 불식시키고 순항하는 배경에 이들의 역할이 크다는 평가가 있다. 부실한 처우와 노로바이러스 확산, 일부 인사의 폭언 막말 등 어려움도 있었지만 설 연휴까지 희생한 자원봉사자의 활약이 한파를 녹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 더욱 풍요로운 ‘명절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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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올림픽 덕분에 온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었다는 왕종배, 전배자 씨(왼쪽부터) 부부가 강릉 아이스아레나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강릉=홍진환 기자


매년 설날 음식 만들기에 바빴던 김 씨는 이번에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 16일 오전 평창 올림픽 직원식당에서 떡국과 전을 먹은 것이다. 김 씨는 “직접 음식 차리다 처음으로 남이 차려준 설음식을 먹었다. 동료 모두 ‘명절 올림픽 할 만하다’며 웃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대학 4학년 때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에서 태릉볼링장 관람객 안내를 맡았다. 결혼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엄두를 내지 못하다 32년 만에 평창에서 자원봉사 유니폼을 다시 입었다. 그는 “한 달 넘게 집을 비워야 해 남편이 처음에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매일 전화 걸어서 ‘옷 따뜻하게 입어라’고 챙긴다”며 활짝 웃었다. 설날 오전 김 씨는 양가 부모에게 안부 전화를 드렸다. 김 씨는 “설날에도 찾아뵙지 못한 불효자식에게 ‘추운데 감기 조심하라’며 격려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차례 지낼 때 내 몫까지 고생하신 형님들에게 가장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번 설 연휴 때 왕종배 씨(66)는 강릉 집에서 잔치를 열었다. 시집 간 딸 가족이 친정에 오면서 서울에 사는 시부모까지 모시고 온 것이다. 왕 씨는 아내 전배자 씨(63)와 부부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가족들이 왕 씨 부부를 응원하기 위해 모두 강릉으로 향한 것이다. 이 덕분에 손주 돌잔치 후 1년 만에 양가 가족이 모두 모였다. 왕 씨는 “아무래도 경조사 때 아니면 사돈끼리 보기가 쉽지 않은데 평창 올림픽 덕분에 더욱 풍요로운 설 명절을 보냈다”며 웃었다.

강릉시의원을 지낸 왕 씨는 현역 의원 시절인 2003, 2007년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 유치 위원 중 한 명으로 참석했다. 그는 “나는 비록 금의환향하지 못했지만 삼고초려 끝에 열리는 올림픽에서 이렇게 자원봉사라도 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 평창은 새로운 기회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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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선수단을 지원하는 신종호 신예지 김다빈 이성길 씨(왼쪽부터)가 시상식 무대인 평창 올림픽플라자에서 힘차게 뛰어오르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평창=장승윤 tomato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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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촌에는 각국 선수단을 전담해 지원하는 자원봉사자가 있다. 김다빈 씨(24)와 신종호 씨(23), 신예지 씨(23·여)는 파키스탄 선수들의 ‘수호신’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복학과 졸업을 앞둔 ‘말년 대학생’이라는 점이다. 또래들은 취업 준비에 학원과 도서관에 파묻혀 있지만 이들은 한 달 넘게 평창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평창에서의 생활을 시간 낭비가 아닌 새로운 기회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봄에 교환학생을 갈 예정인 신종호 씨는 “하루 종일 선수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다 보면 마치 어학연수를 온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김 씨도 “꿈이 스포츠 마케터이다. 이곳에서 세계 최고의 스포츠 스타와 이들을 지원하는 스태프를 보면서 ‘취업연수’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달 졸업을 앞둔 신예지 씨는 “솔직히 아직 내 적성을 찾지 못했다. 평창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고 있다”고 말했다.

세 사람 곁에는 미국 시카고에서 온 이성길 씨(77)가 ‘파트너’로 함께 일하고 있다. 목사 출신인 이 씨는 3000달러(약 320만 원)를 들여 아내와 같이 자원봉사에 참가했다. 이 씨는 “나이 많은 사람이 함께 있으면 힘들 법도 한데 청년들이 배려를 잘해 준다. 자원봉사 태도와 에티켓 모두 훌륭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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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단역과 조연으로 활동한 ‘무명 여배우’ 주예린 씨도 이번 올림픽에선 당당한 주연이었다. 평창=장승윤 tomato99@donga.com


주예린 씨(34·여)의 일터는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 내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이다. 선수들이 경기를 막 끝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인터뷰하는 곳이다. 주 씨는 “결과에 상관없이 벅찬 감정에 눈물을 글썽이는 선수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카메라 불이 꺼진 뒤 내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다.

그는 자신을 ‘무명 여배우’라고 소개했다. 주 씨는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2년 만에 그만뒀다. 연기에 대한 꿈 때문이다.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2009년), ‘캠퍼스의 봄’(2012년) 등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맡으며 꿈을 키웠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7인의 신예’로 선정되기도 했다. 10년 차 배우이지만 아직 대중에게는 생소하다.

작은 역할의 오디션 기회도 아쉬운 주 씨가 30일 넘게 올림픽 현장에 머무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르는 올림픽이잖아요. 솔직히 오디션 놓칠까 걱정도 있지만 설날에 결혼하라는 잔소리 안 들어서 좋아요”라며 웃었다.

평창·강릉=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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