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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5 (화)

[더,오래 인생샷] 명동 쉘부르서 주병진과 오디션 본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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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컷(48) 박충환
한국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특별합니다. 신생아 100만명 시대 태어나 늘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고교 입시 때 평준화, 30살에 88올림픽, 40살에 외환위기, 50살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고도성장의 단맛도 봤지만, 저성장의 함정도 헤쳐왔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아 인생 2막을 여는 58년 개띠. 그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인생 샷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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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근교 관악산 소풍 사진이다. 큰집 식구와 같이 찍었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어머니, 큰엄마, 6촌 여동생, 남동생, 나, 여동생이다. 나는 보이스카우트 복장을 하고 있다.

그때 살던 곳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이었지만 집 근처에 논과 밭이 여전히 많았고, 야트막한 뒷동산에 탄약고 등이 있어 군인들이 보초를 섰다.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다. 1~2학년 때 누런 옥수수빵 배급을 받아 집에 가져와 조금씩 아껴 먹던 기억도, 오후반의 기억도 생생하다. 겨울에 조개탄을 때우던 교실 중앙의 난로도, 난방도 안 되던 교실 창가에서 다 낡은 목재 책상에 앉아 추워 덜덜 떨던 기억도 난다.

아이들은 손이 트기 십상이었고, 코도 많이 흘렸고(나도 흐르는 코를 소매로 쓱 하고 하도 닦아서 소매 끝이 반들반들해졌던 기억도 있다), 해진 양말과 옷 등을 기워 신거나 형한테 물려받아 입던 시절이었고, ‘철수야 영희야 나하고 놀자’를 배우던, 새 학기 책은 지난 달력 종이로 정성 들여 포장해서 쓰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흔해 빠진 삶은 달걀과 과일, 김밥, 사이다 등은 평소에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소풍 때나 학교 운동회 때 겨우 맛볼 수 있어서 소풍날, 운동회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날은 동네 어른들과 가족이 모두 함께하는 축제였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동네 어귀 골목길에서 다방구, 집 뺏기, 자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말까기 등 놀이를 하며 늦게까지 놀았다. 어머니들은 어두워지도록 집에 오지 않는 애들을 부르러 다니기 일쑤였다.

아랫집 대문 앞에서 “00야 놀자!” 하며 친구를 부르던 기억에 지금도 미소가 난다.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자연에 있는 것을 이용해 놀고 즐겼던 그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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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중학교 2학년 속리산 법주사로 2박 3일 수학여행 간 사진이다. 생애 첫 여행지에서 산 등산용 나무단장을 자랑스럽게 들고 있다. 집을 떠나 처음으로 멀리 간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관촉사의 은진미륵도, 사진의 거대한 법주사 불상도, 구불구불 힘겹게 오르던 말티고개도, 낙화암 고란사의 고란초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더 기억나는 것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수학여행은 약간의 일탈을 기대하던 두근두근 여행이었다. 나는 저녁에 장기자랑 대회에 나가 하모니카를 멋지게 불어 박수를 받았다. 선생님 통제에서 벗어나 밤에 묵던 여관을 몰래 빠져나갔다가 들켜서 혼났던 기억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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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봄 서오릉으로 소풍 갔던 사진이다. 왼쪽에 손뼉을 치며 서 있는 게 나다. 흰색 한 줄 소대장 완장을 차고 있다. 당시에는 교련이 필수과목이었다. 반공교육이 정점이었던 그때는 학도호국단이라는 조직하에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등 군대식 체제를 갖추고 나무를 깎아 만든 모형 M16 소총을 들고 총검술, 제식훈련은 물론 구급 조치법 등을 배웠다.

또 교련검열이라고 운동장에서 군대식 사열과 분열행진을 하곤 했다. 2학년 때는 여의도 광장에서 전국교련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반장이었던 나는 소대장이었는데, 전교 회장격인 연대장이 "임석상관에 대하여 받들어 총!"하고 크게 구령을 외치면 "충성! 하며 단상을 향해 "받들어 총"을 외쳤다.

사회 분위기에 맞춰 교련복을 입고 행진하며 소풍을 갔다. 당시는 긴급조치와 유신체제의 살벌한 사회 분위기와 반대로 이른바 청통맥(청바지, 통기타, 맥주)으로 상징되는 낭만의 시절이기도 했다. 가난한 우리는 교복이나 교련복을 입고 카세트테이프나 LP 레코드판, 통기타 앞에 삼삼오오 모여 송창식, 이장희, 김세환 등의 포크송을 합창하며 낭만을 즐기곤 했다.

고등학교 3학년 졸업을 앞둔 겨울에 당시 무명가수의 등용문이었던 ‘명동 쉘부르’에 기타를 잘 치던 친구가 이른바 오디션을 보러 가 친구들과 따라갔었다. 국민 DJ 이종환 씨의 평가를 받아 합격, 불합격이 정해졌다. 친구는 아쉽게도 간발의 차로 고배를 마셨으나 평가가 좋아 우리 음료값을 받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 같이 오디션을 본 주병진, 권태수 등은 합격해 개그맨으로 가수로 나름 유명해졌다.

12시 야간통행금지가 있었던 때라 10시쯤 우르르 빠져나와 생맥주로 휘청거리는 명동, 무교동 거리를 어깨동무하고 활보하던 추억이 있다. 사진에 춤추며 달리고 있는 국어 선생님은 지금 캐나다에 이민 가셨다. 앞의 담임 영어 선생님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실까?

같이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며 놀던 친구들은 지금 대학교수로, 종합병원 의사로, 연구소 책임 연구원으로, 성공한 기업체 사장으로 각자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금도 정기모임을 하며 우정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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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봄 캠퍼스(교정)에서 학과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다 찍은 사진이다. 벤치에 앉아있는 게 나다.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거쳐, 12.12쿠데타, 1980년 서울의 봄, 광주민주화운동까지는 그야말로 격변의 시대였다.

잇따른 계엄령 선포에 휴교령까지 자주 내려져 정상적인 대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캠퍼스에서는 강의 시간보다 학원 민주화, 어용교수 퇴진 등을 놓고 열띤 시국 토론회를 하던지 길거리로 나가 유신철폐, 신군부 퇴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할 때가 더 많았다. 고교동창과 은사가 시위혐의와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신군부에 의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 막바지 서울의 봄 당시 내가 다니던 인천에서 서울까지 원정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의 비극이 발생하던 그 날 최루탄 냄새 가득 밴 채 친구네 집으로 몰려가 국회해산, 김대중 연행 등의 소식을 듣고 울분을 토하며 좌절하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1981년 휴학하고 입대하기 직전에는 아버지를 모시고 여의도에서 열린 ‘국풍 81’ 대규모 문화행사 구경을 간 적이 있다. 당시 방송 통폐합을 단행한 신군부 정권의 선전도구 및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설이 팽배했다.

군 복무 중이던 1982년에는 휴가를 나와 막 출범한 프로야구를 보며 당시 대학교 연고가 있던 인천 ‘삼미 슈퍼스타즈’를 열렬히 응원하던 기억도 난다. 같은 학교 출신 양승관 선수가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역대 최악의 성적으로 꼴찌를 했다. 당시 투수 감사용을 모티브로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그해 가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맹활약을 한 수영선수 최윤희, 최윤정 자매가 시상대에 한복을 입고 섰던 인상적인 장면도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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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일본 클린룸 전시회와 미쓰비시 공장 견학 갔을 때 직원들과 찍은 사진이다. 앞줄 왼쪽이 나다. 나는 1984년 대학을 졸업했다. 건축을 전공한 나는 처음에 건축 설계사무소에 들어가 건축가를 꿈꾸었으나 생각보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아이디어는 많았지만 지금처럼 CAD나 컴퓨터 그래픽 등의 기술이 없을 때라 직접 트레이싱 페이퍼에 잉크 펜으로 도면이나 그림을 그리고 표현해야 했는데, 내 실력이 좀 부족했던 것 같다. 보수도 대기업에 비해 작았다. 당시 우리는 취직해 부모를 부양해야 하는 의무가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1년쯤 다니다 그만둔 후 결국 대기업엔 취업을 못 하고 클린룸, 실내건축을 주업으로 하는 중소기업(전문건설)에 들어갔다. 당시 삼성전자가 막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무렵이었고, 내가 다니던 회사는 반도체 제조공장(클린룸)의 패널공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수원에 있던 현장으로 출근해 함바 밥을 먹어가며 휴일도 없이 밤늦도록 현장에서 일하며 근로자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그때는 너나없이 앞만 보고 열심히 일할 때라 휴일 근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였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반도체 기술은 미국,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앞섰고 우리는 이제 겨우 초기 반도체 64K DRAM 생산을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지금은 10나노급 D램을 양산하며 세계 반도체 시장을 우리 한국이 선도하고 있으니, 그 감회와 더불어 우리 중소기업도 대기업 못지않게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데 뿌듯함을 느낀다.

당시 같이 일본 견학을 갔었던 사진 속 근로자와 직원들도 자신감이 넘쳤었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건설현장에서 고락을 함께하며 한국 건설 산업 발전에 한 축을 담당했다고 자부한다.

1987년 초에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군 고문조작사건을 폭로한 정의구현 사제단의 활약상에 대한 기억, 피를 흘리며 친구에게 부축받고 있는 이한열 군의 사진 기사를 본 기억과 함께 그해 여름은 대학생뿐만 아니라 나같이 젊은 회사원도 거리로 뛰쳐나오게 하였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매캐한 최루탄 냄새의 추억과 더불어 서울시청 앞거리에 나가 호헌철폐를 외치며 자동차 경적시위를 직접 경험했다. 근처에서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께서 손수건을 흔들며 시위를 독려하고 있었던 것 같다.

‘88 서울올림픽’ 때는 직원들과 사무실에서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의 육상 100m 세기적 대결을 지켜보았고, 5공 청문회 때는 TV에서 정주영 회장을 상대로 한 노무현 의원의 활약상에 환호하기도 했다. 1989년 결혼을 하고 그렇게 소망하던 '마이카'도 마련했다. 1993년에 첫 딸이 태어났다. 그리고 결혼 6년 차인 1995년에 청약통장이 당첨되어 서울근교에 작지만 내 집 마련이라는 꿈도 이뤘다.

경제가 비교적 호황이었던 시절이라 1997년 외환위기까지는 큰 어려움 없이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외환위기 당시 직장을 그만둬야 했지만, 같은 업종의 회사에 다시 취직해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고, 만 60세가 되는 올해 무술년이 입사 20년 차가 되는 뜻깊은 해이다.

지금처럼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 하이텔, 천리안 등의 PC 통신 시대, 마이카 시대를 거쳐 벤처, 스타트업의 시대가 오기까지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 현역 34년 차의 곧 은퇴를 앞둔 나이이기는 하지만 아직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분야에 한 번 더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고, 그동안의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작지만, 후배들을 위해서 일할 생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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