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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벳공 로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 여성의 경제 활동를 장려하기 위해 미국 정부가 벌인 캠페인의 산물이다. 당시 남성들이 전쟁에 징집되면서 노동력이 부족해진 미국은 여성들의 노동 참가를 독려하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후방의 군수공장에서 ‘리벳공 로지’로 불리며 용접, 비행기 시공, 군용 차량 조립 등의 일을 했다. 리벳공이란 대형 못 리벳을 박아 비행기 등 각종 철골 구조물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로지는 여성의 이름을 가리킨다. 이같은 작업들은 이전까지만 해도 남성의 영역으로만 인식됐다. 때문에 리벳공 로지는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 아이콘이면서 여성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 활용돼왔다.
1942년 피츠버그의 그래픽 디자이너 하워드 밀러가 그린 포스터는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리벳공 로지다. 포스터 속 여성은 물방울 무늬의 빨간색 반다나를 머리에 두르고. 데님 셔츠를 입은 채 오른팔 근육을 드러내고 있다. 포스터 상단에는 “우리는 할 수 있다(We can do it)!”고 적혀있다. 밀러의 로지 캐릭터는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표, 머그컵, 도시락 통, 티셔츠 등에 단골로 등장한다.
포스터 속 로지의 실제 모델인 프랠리는 1921년 오클라호마주 털사에서 태어났다. 프랠리는 스무살이던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알라메다의 해군항공기지 군수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행기 날개에 구멍을 뚫고 리벳을 박아 이어붙이는 등의 작업을 했다.
리벳공 로지는 반세기 넘게 여성 노동자의 아이콘으로 소비됐지만, 프랠리와 로지의 관계가 밝혀진 것은 불과 2년 전이다. 2016년 뉴저지의 시턴홀 대학 제임스 킴블 박사가 6년 간의 추적 끝에 포스터 속 여성이 프랠리임을 증명하면서다. 그 전까지는 미시간주 출신의 여성 호프 도일(2010년 사망)이 모델로 알려져 있었다. 프랠리는 당시 주간지 피플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유명세나 부를 원하지 않았다”며 수십년 간 조용히 지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다만 나의 정체성을 원했다”고 했다.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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