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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기고]1987년을 열었던 남영동의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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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잘 모르는 일이 하나 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일을 남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때이니 기록이 있을 리 없고,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있었지만 없었던 것이 된 일이다. 박종철, 그가 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 청사 5층 9호에서 참혹하게 살해되고 나서, 그의 죽음이 한 시대를 여는 역사적 사건이 되기까지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영화 <1987>에서 보듯 말이다. 바로 1987년을 고유명사로 만들었던 역사적 고리 중 하나에 관한 이야기다.

경향신문

1월22일, 그러니까 아직 박종철의 죽음이 국민적 저항운동으로 확산되지는 못했던 때, 군부독재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을 잠식하고 있던 때, 감히,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서 가두시위를 벌인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의 대공분실이 어떤 곳이었던가. 사람을 죽여도 괜찮은 권력을 가진 곳,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는 것으로 알았던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바로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떨면서도 시위에 나선 것이었다. 인원은 30명을 넘었고, 시위대는 모두 여성이었다. 남영동 금성극장 주변 다방과 골목에 숨어있던 그들은, ‘우리가 상주’라는 뜻에서 삼베로 만든 수건을 쓰고 “박종철은 내 아들이다”로 시작되는 성명서를 뿌리며 “박종철을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쳤다. 경찰이 곧 그들을 둘러쌌고, 일부는 연행되고 일부는 주변 골목으로 쫓겨가 연좌시위를 계속했다. 이것이 닷새 전 민가협에 이어 박종철의 이름을 남영동에서 부른 가두 대중 시위였다. 이날 시위는, 지금은 고인이 된 여성운동가 이우정, 박영숙이 앞장섰고, 안상님, 김희선을 비롯한 한국여성단체연합, 교회여성연합 여성들이 함께했다. 시위는 불과 몇십분 만에 진압되었지만, 그들의 용기는, 공포로 얼어붙은 시대를 깨웠고, 6월항쟁의 불을 붙인 불씨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그 불씨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6월18일 최루탄추방범국민대회의 도화선이 된 것도 여성들의 시위였다. 그들은 이한열이 쓰러지고 나서 이틀 후, 남대문 삼성본관 앞에서 성공회 성당까지 최루탄을 뚫고 행진하며 죽음의 진압을 거두라고 외쳤고, 국민운동본부에 최루탄추방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했다.

누구의 자식도 죽이지 말자고 독재의 또 다른 피해자인 전경들의 총구에 꽃을 꽂기 시작한 것도 여성이었다. 최루탄을 쏘는 총구에 꽂혔던 그 꽃이 사소해 보이는가? 그 꽃은, 이 싸움이 시위대와 전경의 싸움이 아니라 국민과 군부독재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대중에 널리 알린 상징적인 꽃으로, 민주화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계기를 만든 것이다. 전혀 사소한 것이 아니다.

대개 여성들이 한 일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는 ‘보지 않는다’. 사소하게 취급하거나 마치 거기에 없었던 것처럼 삭제되곤 한다. 수많은 항일여성독립운동가들 중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여성은 2%가 채 안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러나 삭제되어 보이지 않던 고리를 복원해야 역사라는 거대한 줄이 온전하게 완성된다.

영화를 예로 들어보자. 감옥에 있던 이부영이 보낸 쪽지가 명동성당에 전달되기까지는 김정남과 교도관 외에 하나의 고리가 더 있었다. 주부 황숙자와 그의 딸이었다. 그들은 첩보 영화와 같은 과정을 거치며 문건을 전하는 일을 여러 번 수행했다. 그들이 생략된 것은 여성이어서인가? 영화 속 여성은 대부분 주변인이거나 보조자이지만 역사 속 실제 여성은 그렇지 않았다. 왜 여성들이 한 일은 삭제되어 보이지 않는 고리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고리를 어떻게 가시화할 것인지, 이것이 지금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며칠 전, 20대 후반에 접어든 한 젊은 여성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여자들은 그때 어디에 있었어요?” 그 여성에게 대답했다. 여자들은 바로 거기에 함께 있었다고. 그러고 와서 이 글을 쓴다.

<정영훈 한국여성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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