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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헌법 11.0 다시 쓰는 시민계약]“딸 키우며 나도 성장…아빠들에게도 행복할 기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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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째 육아 전담하는 아빠 박찬희씨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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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희씨(49)는 마흔하나에 아빠가 됐다. 딸 서령이를 낳고 아내가 1년 육아휴직을 했지만 지방에 계신 부모님들이 육아를 도와주실 수 없어 아이를 돌봐줄 ‘시터 이모님’을 구했다. 하지만 이모님이 아이를 봐줄 수 없게 되는 바람에 결국 박씨가 직장을 그만뒀다. 호림박물관 학예사로 11년을 일했지만 딸을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14개월 될 때부터 1년 동안 아내 퇴근 때까지 온종일 아이를 혼자 돌봤고 이후에는 어린이집을 보내면서 박물관에 관한 책을 쓰고 교육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딸을 돌보며 2년 동안 쓴 일기를 여성신문에 연재했고 <아빠를 키운 아이>라는 책도 냈다.

■ “아이 기르는 삶, 아빠도 행복해요”

박씨가 2010년 9월부터 아이를 전담해 키운 지 벌써 8년, 서령이는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 된다. 여전히 아내는 오전 7시30분쯤 출근하고 오후 8시쯤 퇴근한다. 야근하는 날에는 더 많이 늦으니 서령이를 학교에 보내고 데려오고 돌보는 일은 박씨 몫이다. 처음에는 아빠가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부모가 아이와 함께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딸을 키우면서 부모가 자신을 먼저 되돌아봐야 한다고 믿게 됐고 놀기 위해 세상에 온 아이와 마음을 다해 함께 놀면 가정의 평화가 올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됐어요.”

딸이 온전히 자라는 모습을 곁에서 본 행복은 다른 것과 바꿀 수 없었다. 아이를 처음 포대기로 업었던 날 아이가 깰까봐 계속 업고 있어야 했던 순간, 유모차 태워 산책할 때 아이가 예쁘다고 칭찬하던 동네 사람들의 말들을 전해주며 그는 “행복이 뭔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 아이가 자라자 말다툼을 할 수도 있게 됐다. 그는 “아이와 나눌 대화가 늘어나서 좋다”며 “아이들 입장을 다른 사람보다는 많이 알게 됐으니 박물관 가서 일 이야기를 할 때도 아이들 눈높이에서 이야기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육아는 외로웠다. 육아하는 아빠들을 찾기 힘들었다. “요즘에 젊은 엄마들이 ‘독박육아’라고 부른다면서요. 그래도 엄마들은 ‘동네 네트워크’라도 만들 수 있는데 아빠들은 그런 게 없어요. 여전히 친구들은 ‘왜 일을 그만뒀냐’고 묻죠. 그래도 처음 서령이를 키울 때보다는 공간이 넓어지는 느낌이에요. ‘육아하는 아빠 모임’도 생기고 서로 인터넷상으로 수소문해서 만나기도 하거든요.”

박씨는 “이전 세대 아빠들은 ‘일’ 중심으로 살아 은퇴하고 나면 집안에서 ‘찬밥’이 됐다”며 “자식과의 대화란 시간이 축적돼 관계가 만들어져야 가능한 것인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라는 이유로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면 당연히 관계는 더 소원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친구들에게 말해요. 제발 훈계 좀 하지 말고 아이들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먼저 들어보라고요.” 아이를 키워보니 사회 시스템이 아빠들의 육아 기회를 박탈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출산고령화대책위 토론회에 갔었는데 핵심 문제를 건드리지 않더군요. 아이와 함께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줄이려고 해도 대출해서 집 사고 학원비 많이 들어가는 핵심 고리를 건드리지 않으면 해결이 어려워요. 이제는 큰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에요. 아빠 육아휴직을 강제하는 제도처럼 아빠들에게도 가족의 온전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해요.”

■ ‘여성의 남성화’만큼 ‘남성의 여성화’ 필요

아이를 돌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 박씨는 한국 사회에서 특이한 경우다. 보통은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는 쪽은 엄마다. 여성의 임금이 남성보다 적은 탓도 있지만 출산과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2017년 1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지표를 통해서 본 우리나라 저출산 대응 정책의 진단과 과제’ 보고서를 보면 배우자가 있는 여성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녀 수는 2.25명인데 실제로 낳는 자녀 수는 1.75명(완결출산율)에 불과했다. 여성이 실제로 낳고 싶어 하는 수만큼 자녀를 낳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안 낳는 것’이 아니라 ‘못 낳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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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난 만큼 남성의 육아 및 가사노동 분담은 필수적이다. 윤홍식 인하대 교수는 “여성이 남성화된 만큼 남성이 여성화되어야 문제가 풀린다”고 말했다. 2014년 현재 주당 60시간 이상 일하는 남성 근로자의 비중은 한국이 26.3%로, 일본의 13.6%보다 높고 OECD 평균인 7.9%보다 높다. 배우자가 있는 남성이 하루 평균 가사 노동에 참여하는 시간은 1999년 24분에서 2014년 34분으로 10분 증가했지만 돌봄 노동에 참여하는 시간은 1999년 11분에서 2014년 16분으로 5분밖에 늘지 않았다. 윤 교수는 “밖에서 일하는 사람은 돌봄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성 노동 모델”이라며 “모든 일하는 사람은 돌봄의 책임이 있는 사회, 성별에 관계없이 돌봄을 담당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과도한 생계부양자 역할에서 남성을 해방시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북유럽 국가들은 여성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으로 성평등과 저출산 문제의 실마리를 풀었다. 공공 영역 및 보건·교육·복지 영역에서 만들어낸 일자리의 70%를 여성에게 준 것이다. 여성의 경제력 신장은 가정 내 성평등 지수 상승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남성의 노동 시간은 줄이고 육아와 보육 등 재생산 영역에 남성을 실질적으로 끌어들였다. 스웨덴은 2016년 1월부터 육아휴직제도의 의무할당기간을 60일에서 90일로 확대했다. 육아휴직제도는 480일간 부부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고 유급이다. 덴마크는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가 2주간의 부성휴가를 쓸 수 있다. 일부 코뮌에서는 ‘아빠 놀이터’를 운영 중이다. 독일도 ‘아빠들의 공간’이라는 뜻의 ‘파파라덴’(Papaladen)에서 육아 강좌, 상담 프로그램, 여행 프로그램 등으로 아버지의 양육을 지원하고 있다. 2016년 유엔여성지위위원회는 제60차 회의에서 “무급 돌봄 및 가사 노동이 동등하게 공유, 인정 감소 및 재분배될 수 있도록, 현재의 성별에 따른 노동 분배의 변화를 통하여 공식경제에 여성이 완전히 통합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OECD도 가족 지원 정책의 방향으로 일·가정생활 양립 지원, 성평등 증진, 잠재적인 여성 인력 활용 등의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 성차별 금지 아닌 성평등 구현

성평등에 관한 한 한국은 갈 길이 멀다. 현행 헌법은 성차별 문제를 일반적 차별금지 조항인 11조에 포함시키고, 노동·복지를 다룬 5개 조항에 모성 보호 등의 내용을 언급하며 국가가 여권 신장에 노력해야 한다는 수준이다. 이에 국회 개헌특위 자문위원회는 실질적 성평등 실현을 국가 목표로 규정하고 성평등과 성적 자기결정권 관련 내용을 모아 별도의 조항을 신설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성평등을 독립 규정으로 만들자는 제안은 2009년 국회의장 헌법연구 자문위원회, 2014년 국회 헌법개정 자문위원회에서도 나왔다. 최근에 헌법을 바꾼 나라들은 성평등을 독립 규정으로 넣었다. 유럽연합기본권헌장도 고용, 노동, 임금에서의 성평등을 규정하고 있다. 김수희 한국여성단체연합 부장은 “일반적 평등권 조항과 별도로 실질적 성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책무조항을 신설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성평등은 여성이 남성의 지위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성평등이란 생리적 차이와 사회적 차이를 고려하는 것, 남녀가 사회와 가정에 공동으로 참여하여 권한과 책임을 분담하고, 평등 상생의 발전, 평화의 이념이 구현되는 사회와 남녀관계를 포괄한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신필균 헌법개정여성연대 공동대표는 “모든 사회 정책들은 남성 중심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항상 사각지대에는 여성들이 남는다. 성평등을 기치로 내건 정부만이 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본다”며 “개정 헌법에 ‘성평등한 국가’가 전제가 되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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