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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9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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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사이버성폭력 근절 위해 NGO 만들어 알바하며 무급으로 활동한

리아·서랑·승진·여파·효린… 제도화 성과 뚜렷


‘2017년, 세 개의 싸움이 있었다’라는 한 문장으로 지난 한 해를 회상한다면, 너무 가혹한 축약일까.

<한겨레21>은 2017년을 떠나보내고, 2018년을 맞으며 세상과 힘겹게 ‘싸우는 여자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세밀화 세 편을 준비했다.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게 이것은 다소 지루한 싸움으로 보일지 모른다. 1980년대에 가정 내 ‘아내 폭력’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드러낸 여성운동은 1997년 가정폭력방지법을 제정함으로써 가정폭력이 ‘사소하거나 개인적인 일’이 아님을 인정받았다. 이후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을 계기로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됐고, 2002년 1월 전북 군산 개복동 성매매집결지에서 일어난 처참한 화재 참사 이후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됐다.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로 이어지는 20여 년의 입법 투쟁 뒤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말처럼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법이 아니라’ 법을 적용받을 수 있는 ‘힘’”(<한국여성인권운동사2: 성폭력을 다시 쓴다>, 한국여성의전화 기획·정희진 엮음)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의 싸움은 2017년 온라인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의 특성과 결합해 폭발했다. 미국 영화계 인사들은 10년 전 자신이 겪었지만 말할 수 없었던 성추행·성폭력 경험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공유했다. 이들은 SNS 등을 통해 ‘나도 그랬어’라는 ‘미투 운동’을 전개했다. 한국에서도 성추행·성폭력 피해 당사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폭로하는 ‘해시태그 성폭력 고발’이 이어졌다. 미국 언론 <타임> <파이낸셜타임스> 등은 ‘올해의 인물’로 ‘미투 운동’을 촉발한 여성 당사자들을 선정했다.

한국에서 진행된 성폭력 고발은 미국과 같은 ‘해피엔딩’을 가져오지 않았다. 힘겹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은 여성들은 대부분 무고·명예훼손 등 역고소를 당하며 가혹한 법정 싸움을 감수하고 있다. 물론 긴 고민 끝에 고발을 선택하고, 담대하게 싸워, 법정에서 가해자의 유죄판결을 이끌어낸 이들도 있다. 여성 문인 138명, 후원자 2321명이 동참한 <참고문헌 없음> 프로젝트의 출발점 ‘고발자5’가 그들이다.

<한겨레21>은 언론 가운데 처음으로 ‘고발자5’ 당사자들을 만났다. 이들은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고통에서 벗어나 ‘피해자 낙인’ ‘피해자의 전형성’을 거부하며 더욱 건강해지고 있었다. 아니, 더욱 건강해지려 노력하고 있었다.

<한겨레21>이 조명한 두 번째 여성들은 디지털성범죄와 싸우는 ‘사자단’이다. 20대 여성(2017년 현재)들로 꾸려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는 낮엔 아르바이트로 월 50만원을 벌고, 오후와 밤으로 이어지는 시간엔 ‘사이버성폭력’이 뭔지 알리고, 사이버성폭력의 입법·정책적 대안을 정부기관에 제안하고, 제도화를 노력하며 피해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한사성을 비롯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지난해 9월26일 국무조정실과 14개 정부부처가 합동으로 ‘디지털성범죄 피해방지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이들의 싸움은 2018년에도 더욱 확장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영상콘텐츠+서명운동+펀딩의 삼위일체 패키지 캠페인 ‘Here I am’(내가 여기 있어요) 을 추진하는 십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 대표, 조소담 <닷페이스> 대표, 장은선 <닷페이스> PD를 만났다. 이들은 아동·청소년의 성을 매수하려는 성매수남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조명하는 방식이다. 2018년에도 ‘싸우는 여자들’의 활동은 계속된다.


한겨레21

사이버성폭력을 뿌리 뽑기 위해 싸우는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들. 왼쪽부터 승진, 리아, 효린, 서랑, 여파. 김진수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국산 야동이 아니라 범죄 영상입니다.”

2017년 5월25일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가 기자회견을 열고 세 가지를 요구했다. 1. 사이버성폭력 전담 부서 신설 2. 가해자 처벌 강화 3. 피해자 지원 확대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을 나흘 앞둔 2017년 5월5일 국민에게 문자메시지로 제안받은 10대 공약을 공개했다. 10대 공약에는 1400건의 문자메시지를 통해 시민들이 요구한 ‘몰카, 리벤지 포르노 완전 근절’이 포함돼 있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사성은 문 대통령에게 이 공약을 지키라고 촉구했다. 여러 언론사에 기자회견 일정을 미리 알렸지만, 관심을 보이거나 취재를 위해 현장을 찾은 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

피해자가 200만원 주고 지워야 하는

넉 달 뒤인 9월26일 문재인 정부는 ‘디지털성범죄 제로, 국민 안심사회 구현’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디지털성범죄 피해방지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국무조정실 주관하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여성가족부·법무부 등 14개 부처가 공동 참여했다. 문재인 정부 처지에선 대통령 공약을 실천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인 이들이 있다. 디지털성범죄 실태를 사회에 알리고, 문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공약 이행을 요구하며, 이를 뿌리 뽑기 위해 국회·정부부처 등에 끈질기고 치열하게 정책과 입법 제안을 해온 한사성 사람들이다. 대중이 온라인에 돌아다니는 몰래카메라 영상 등을 ‘국산 야동’쯤으로 여기며 즐기고 있을 때, 한사성은 이것이 ‘성범죄’라는 문제의식을 가슴에 품었고 세상을 바꿔냈다.

이 활동의 중심에 선 한사성 활동가 리아·서랑·승진·여파·효린을 만났다. 한사성은 2017년 2월 문을 연 신생 비영리 시민단체다. 활동가를 모을 때 나이는 고려하지 않았지만, 현재 모두 20대로만 이뤄져 있다. 한사성의 주요 활동은 사이버공간에서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일이다.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하면 전화·전자우편·대면 상담을 한다. 불법 촬영물 피해자일 경우 영상 삭제 지원, 수사 지원 및 동행, 법률 지원, 여성주의 지지 상담 연계 등을 한다.

12월20일, 서울 대방동 여성회관 4층 구석에 자리한 한사성 사무실 문을 열었다. 사무실 가림막에는 2017년 11월11일 한사성이 한국성폭력상담소와 공동으로 연 ‘사이버성폭력 OFF 토크콘서트_난 너의 야동이 아니야’ 팸플릿이 붙어 있었다. 가수 겸 감독 이랑, 가수 오지은, 이나영 중앙대 교수 등이 패널로 나와 사이버성폭력의 현황과 대응책 등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승진 등이 6개월간 준비해 성황리에 마무리한 첫 토크콘서트였다. 팸플릿 외에 전국디바협회, 불꽃페미액션, 페미몬스터즈 등 2016년 서울 강남역에서 일어난 여성 살해 사건 뒤 만들어진 낯익으면서도 낯선 모임들의 이름표가 사무실 벽 곳곳에 붙어 있었다.

“지난해 8월 여성회관에서 사무실 입주단체 공고를 내서 들어왔어요. 불꽃페미액션, 페미몬스터즈 등과 같이 사무실을 써요.” 한사성 대표 서랑이 말했다. 사무실을 얻기 전까지 한사성은 노트북, 자료, 책 등을 이고 지고 다니는 유목민 생활을 했다. 서울의 서쪽 끝 강서구 방화동에 있는 녹색당의 한 공간을 빌려 낮에만 쓰다, 이후에는 또 다른 단체의 공간을 빌려 썼다. “저희 집이 정반대쪽인 경기도 판교거든요. 아, 정말 눈물의 출근길이었어요.” 승진이 말했다.

‘유목민’ 생활을 하던 한사성의 지난해 여름은 뜨거웠다. 이들은 사이버성폭력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여러 국회의원실과 접촉했다. 100여 개 국외 포르노 사이트, 60여 개 P2P(개인 간 파일 공유) 사이트를 모니터링해 ‘국노’(국산 노 모자이크), ‘골뱅이’(술에 취한 여성을 성폭행하는 동영상) 등의 단어로 검색되는 ‘유출 동영상’이 날마다 꾸준히 2만 건가량 유지되는 현실, 동영상이 유통되는 웹하드 업체와 삭제하는 ‘디지털 장의사’ 업체의 유착, 피해 동영상을 지우기 위해 피해자가 월 200여만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부담 등을 설명했다.

사이버성폭력 처벌 쉽지 않은 현실

한겨레21

현행법상 처벌되는 사이버성폭력은 크게 두 범주로 나뉜다. 첫째는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성범죄 특례법) 제14조에 따른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이다. 흔히 말하는 ‘몰래카메라’가 이에 해당한다. 카메라 등을 이용해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하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의사에 반해 촬영하거나 유포하는 행위다. 촬영 때 당사자가 동의했더라도, 의사에 반해 유포하는 행위 역시 처벌받는다. 둘째는 촬영자·유포자를 알 수 없는 몰래카메라다. 피해자의 당혹감과 절망감은 매우 크지만, 가해자가 특정되지 않기 때문에 이 범죄는 성범죄 특례법이 아닌 정보통신망법에 처벌된다.

이 지점에서 수많은 문제가 파생된다.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자신의 유출 영상이 ‘음란물’로 분류된 피해 여성은 국선변호인 선임, 피해 상담 등을 지원받을 수 없다.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수사관으로부터 ‘그러게 왜 동영상을 찍었냐’ ‘왜 섹스를 했냐’라는 질책과 ‘음란한 여자’라는 시선을 받기 일쑤다.

더 큰 문제는, 현행 법규상 ‘동영상 유출·유포’를 제외한 사이버성폭력의 처벌은 사실상 이뤄지기 힘들다는 점이다. “온라인 게임 내에서 벌어지는 언어 성희롱, 카카오톡 등 대화창의 집단 성희롱, 성관계 동영상이 있다며 협박해 원치 않는 성관계를 요구하는 등 다양한 사이버성폭력이 있다. 이런 사이버성폭력은 제대로 정의되지도 않고 있다.” 서랑 대표가 말했다.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한사성은 2017년 7월7일 국회 토론회를 주관했다. 이후 ‘사이버성폭력’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언론 보도가 이어졌고 국무조정실 등 정부부처로부터 여러 간담회 제안을 받았다. 이들은 부처와 협의해 수사 전담 부서 신설, 피해자 지원 원스톱 서비스의 필요성 등을 역설했고 이는 대부분 9월26일 대책에 포함됐다. 여성청소년계, 사이버수사팀 등으로 핑퐁 치듯 수사가 왔다갔다 하던 관행이 바뀌어 17개 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팀이 ‘사이버성폭력 범죄’를 전담키로 했다. 여성가족부는 1366 신고 서비스를 통해 사이버성폭력 피해자의 신고 상담도 받으며, 동영상 삭제 지원을 위해 2018년 7억4천만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이런 활동을 진행하며 한사성은 본연의 업무인 피해자 지원과 상담도 계속해왔다.

한사성 활동가들은 최근까지 무급으로 일했다. 서랑 대표는 “각자 생활비는 있어야 하니까, 오전 시간이나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월 50만~60만원 정도를 벌었다”고 말했다. 승진은 건강·미용 상품을 파는 가게에서 오전부터 오후 3시까지 상품을 개봉·진열하는 일을 했고, 여파는 대형마트에서 세네갈산 갈치를 팔았다. 리아는 주중에 학교를 다니고 주말엔 대형서점에서 일하며 한사성 활동을 이어갔다.

“오롯이 쉬는 날이 하루도 없다는 게 힘들었어요. 평일이나 낮 시간엔 일하고 끝나면 또 단체 일을 했으니까.”(승진) “국회 토론회를 준비할 때는 갈치를 파는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노트북을 꺼내서 토론회 자료를 정리했어요.”(여파) 적은 액수지만 ‘월급’이 나온 지 두 달 됐다는 이야기를 하며 5명은 환호성을 질렀다.

“클릭해서 보는 사람도 처벌받아야”

이들의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걸까. 리아가 말했다. “제가 중학생 때부터 인터넷 헤비 유저였거든요. 2005~2007년부터 디씨인사이드 같은 사이트에 몰카 동영상이 올라왔어요. 중학생 때 그걸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굉장히 무력하면서, 동시에 ‘나는 절대 당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공부하듯 유출 동영상을 관찰했어요. 그 과정에서 문제의식이 커졌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아요.”

서랑 대표는 “‘사이버성폭력 동영상’의 존재를 안 뒤 이전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2015년 소라넷 기사를 보고 들어가봤더니 강간 모의 글, 후기 등이 올라와요. ‘모월 모일 이 여성을 강간하려는데 모이자’라고 하면 수천 개 댓글이 붙어요. 지인 능욕 게시판에서는 여성을 능욕해요. ‘이 문제를 어떡해야 하냐’고 당시 남자친구에게 이야기했는데 ‘그걸 없앨 수는 없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이걸 없앨 수 있다, 없애야 한다는 오기가 생겼던 것 같아요.” 반성폭력 운동이 ‘당사자운동’으로 진화하고 폭발한 것처럼, 한사성의 운동도 당사자성이 매우 짙다.

한사성은 계속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고, 피해자와 연대를 강화하려 노력하고 있다. “9월에 정부 대책이 발표된 뒤 웹하드 업체 두 곳을 모니터링해보니 ‘국노, 국NO, 국, 몰카, 유출’ 등의 키워드가 포함된 영상물 수는 큰 폭으로 줄었어요.” 제도로 불법 영상을 줄일 수 있다는 얘기라고 서랑 대표가 지적했다. “외국에 서버를 둔 불법 포르노 사이트의 경우 영상 삭제를 요청해도 듣지 않아요. 111개의 국외 불법 포르노 사이트를 조사했더니 거의 모든 사이트가 유동 IP를 사용해, IP를 차단해 접속을 차단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수사기관의 국제적 협업이 필요해요. 한사성은 2018년 국외 사이버성폭력 피해자 지원 시민단체들과 연대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고요.”

이 싸움은 언제 끝날까. 각자의 답이 이어졌다. “유포자도 문제지만, 클릭해서 보는 사람도 처벌받아야 해요. 유출 영상이 올라오더라도 조회 수가 0인 세상, 가능할까요?”(리아) “‘국산 야동이 내 취향이야. 진정한 사랑이 있는 영상만 나를 흥분시켜.’ 이걸 취향이랍시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말을 하는 순간 성폭력 가해자라는 인식이 생기면…, 그때쯤?”(승진)

유출 동영상 ‘조회 수 0’인 세상을 위하여

이들의 활동에 대해 ‘성보수화’의 우려도 있다. 모든 것을 처벌하고 법적으로 금지하는 대책은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이런 우려에 대해 서랑 대표는 말했다. “‘불법 촬영물’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생긴다면 그런 오해는 사라지지 않을까요?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는 성적 촬영물이 사이버공간에서 유포되고, 사람들이 이를 클릭하는 것을 규제하고 처벌하는 것은 성보수화와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2018년 2월, 한사성은 1살이 된다. 이들이 주변 단체와 연대하며 지평을 넓히고 단단해질수록, 한국 사회는 이전보다 좀더 안전한 곳이 되지 않을까.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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