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9월, 소말리아 바이도아는 가뭄과 치열한 전투로 인해 극심한 기아의 진원지로 고통받고 있었다. 아이와 엄마들은 병들고 집 잃은 사람들로 넘쳐 나는 난민 캠프의 의료텐트에서 기대도 희망도 잃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당시 국제사회는 매년 수백만 명의 아이들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상황을 불가피한 일로 여기고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때 마르고 등이 구부정한 70세 백인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누가 저에게 물 한잔 주시겠습니까?" 카랑카랑하고 똑부러지는 말투의 요청에 누군가 물을 건네자 그는 본인이 가지고 다니던 소금과 설탕을 넣어 아이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심각한 탈수로 인한 치명적 증상을 멎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곳의 엄마들에게 다시 한 번 똑부러지게 말했다. "당신 아이는 죽지 않을 겁니다. 여기 있는 아이들에게 똑같은 조처를 해주세요." 며칠 후 그의 약속은 현실이 돼, 그곳의 아이들은 회복했다.
일화 속 주인공은 유니세프 3대 총재인 제임스 그랜트. 그는 이렇게 재임기간 중 전쟁과 가난에 짓눌려 폐허가 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꺾이지 않는 낙관적 태도로 '아동 생존 혁명'을 이뤘다. 그 덕분에 유니세프는 창립취지보다 활동범위를 넓혀나갔다. 긴급 구호에 그치지 않고 자연재해, 질병, 영양실조 등으로 고통받는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내밀었고 어린이들의 교육과 가족계획 문제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유니세프가 종전에 활용하지 못했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확장해 어린이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기구로 거듭나게 된 것은 그가 일궈낸 성과였다.
'혁명'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보수적인 구성원들과 주변의 반발과 불만에 부딪히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던 그의 모습은 오늘나라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빈곤을 상대로 한 투쟁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릴 뿐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 두려워 다수와 권력의 편에 아첨하고 묻어가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할 것이다.
◇ 휴머니스트 오블리주 = 애덤 파이빌드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펴냄. 504쪽/1만8000원.
이경은 기자 kelee@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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