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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부족한 병력, 불리한 전황…모든걸 뒤집는 `한번의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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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모두가 그에게 인류의 미래를 묻지만, 정작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 역사학과 교수의 전공은 중세전쟁사다. 여러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역사를 조감한 '사피엔스'도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중세전쟁사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태어난 책이었다. 2007년 나온 그의 첫 저작이 국내에 뒤늦게 번역돼 나왔다. 바로 지상 최고의 작전에 관한 책이다.

'대담한 작전'은 과거 기사도 시대에 벌어진 전쟁의 특수작전을 다룬다. '특수작전'이란 투입된 자원에 비해 전략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당한 결과를 이끌어 낼 능력이 있는 소규모 부대가 좁은 지역에서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수행하는 전투작전을 말한다.

특수작전이 중요한 건 전쟁의 변곡점을 만들어 낼 수 있어서다. 예를 들어 현대전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핵 개발 프로그램의 핵심 고리 중 하나인 노르웨이 리우칸의 노르스크하이드로 발전소 공격 작전은 독일의 핵 개발을 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책은 1098년 십자군 전쟁부터 1536년 프랑스-합스부르크 전쟁까지 중동과 프랑스 전역의 전쟁을 다루는데 등장인물만 250명이 넘는다. 치밀한 고증과 생생한 묘사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하라리는 특수작전이 독특한 특징들 덕분에 전쟁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뛰어난 렌즈 역할을 한다고 저술의 의미를 밝힌다. 군사적 목적과 수단이 섬세한 균형을 이뤄야 하므로, 전쟁의 시대적 목적을 엿볼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떠올리는 특수작전의 이미지는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블랙 호크 다운'과 같은 깔끔하고 멋들어진 신화에 가깝다. 하지만 그는 특수작전이란 영웅적이고 기념비적인 사례와 한참 동떨어진 속임수, 배신, 뇌물, 암살 등 여러 반칙에 의존한 경우가 많고 '기사도 문화'와도 동떨어져 있음을 논증한다.

그가 들려주는 6개의 작전 중에서 가장 극적인 건 16세기 초 서유럽 패권을 놓고 다툰 프랑스와 스페인,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쟁이다. 파비아 전투에서 궤멸돼 포로 신세까지 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1536년 다시 오스만제국과 함께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섰다. 합스부르크의 카를 5세는 프랑스로 진격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었다. 황제의 군 6만명과 맞설 프랑스군은 3만명에 불과한 용병들이었다.

프랑스 사령관 몽모랑시는 지구전을 택했다. 론강을 건너는 다리에 방어를 강화하고 산맥과 바다, 강 사이에 제국군을 몰아넣은 것이다. 프랑스 군대는 제국군의 식량이 되는 걸 막으려 가축을 도살하고 밭에 불을 지르고 방앗간을 파괴하게 했다. 오리올 단 한 곳을 빼고서. 제국군이 점령한 지역에 있던 오리올의 방앗간은 제국군 보급의 초석이 됐다. 이 제분소 하나에서 나오는 옥수수가루로만 6000명이 먹었다. 프랑수아는 부대 전체를 희생해서라도 그 방앗간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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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세유부터 오리올까지는 25㎞의 가는 길에 정찰병과 부대가 우글거렸다. 오리올과 방앗간을 지키는 병사도 300명이 넘었다. 유능한 지휘관들은 1000명을 준다고 해도 하나같이 작전을 거부했다. 이 불가능한 임무를 승낙한 건 30대의 이름 없는 보병 장교 블레즈 드 몽뤼크였다. 마르세유의 병사들은 민간인 집에 머물렀는데 몽뤼크가 묵은 집 주인은 마침 오리올 출신이었다. 그는 단 120명의 엘리트 병사를 이끌고 산길을 통해 도보로 오리올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25㎞를 돌아오는 길에 추격하는 경기병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산길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는 집주인을 작전 장교로 삼아 민간인 길 안내원 3명을 구했다. 출발은 해 질 녘, 도착은 새벽이었다. 잠에서 제대로 깨지 않은 수비대는 육박전으로 신속하게 제압했다. 60명에게 방앗간 밖에서 성문을 막아 달라고 한 몽뤼크는 맷돌을 굴려 강에 빠뜨리고 건물을 불태웠다. 동이 트기 전에 작전은 끝났다. 지친 몸으로 그들은 휴식도 없이 빵을 씹으며 복귀길에 올랐다. 중상자는 1명뿐이었다. 제국군 기병은 산길에 들어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방앗간의 파괴는 제국군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부실한 식사로 설사병이 번져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국군은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8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강을 건너온 병사 중 다시 살아 돌아간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큰 교전 한 번 없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른 전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오늘의 대중문화가 중세의 특수작전에서 이야기를 많이 훔쳐 왔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예를 들어 12세기 '백조의 기사와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노래'는 1차 십자군전쟁이 발발하기 몇 해 전 이슬람 통치자 코르바란의 어머니가 십자군전쟁을 예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고드프루아라는 제후가 프랑크족의 땅에서 와서 예루살렘을 정복할 것이라고 아들에게 경고한다. 코르바란의 아들인 코르누마란은 이 재앙을 막기로 결심하고 성지에서 돌아오는 기독교 순례자로 위장한 채 유럽으로 향한다. 어린 고드프루아를 찾아 죽이기 위해서다. 유럽을 가로지르면서도 신분을 잘 숨겼던 그는 에노에서 진짜 순례자에게 발각돼 작전에 실패하고 만다. 영화 '터미네이터'와 흡사하지 않은가.

하라리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 한복판에서 이 책을 집필했다. 이 전쟁에서 양편 모두의 획기적인 전기가 된 군사작전들 중 대부분은 비록 서로 형태가 다를지언정 특수작전이었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조직은 이스라엘의 인구 밀집지역과 국가적인 상징을 콕 집어서 공격했고,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 사령관, 정치인을 납치하거나 암살했다." 전쟁사를 전공하게 된 이유를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특수작전은 비대칭 전력 간의 전쟁에서 흔히 등장한다. 목숨을 건 탈출, 속고 속이는 계략, 도박적인 모험 등을 통해 특수작전은 '가장 효율적인' 승리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된다. 이 책은 비록 손에 피를 묻힐지언정, 평화의 도구로서 특수작전의 역설적 의미를 알려준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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