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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허연의 책과 지성]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889~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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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천재는 천사와 악마가 함께 있는 사람이다. 그 천사와 악마는 사전 동의 없이 서로 자리를 바꾸어 앉는다. 그리고 타인이 그것을 통제할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천재는 천진난만해 보일 정도로 자연스럽고 당당하다. 이런 기준으로 봤을 때 최고의 천재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이다.

몇 사람 더 떠오르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부합하지는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천재였지만 성실한 팔방미인이라는 점에서 순도가 떨어진다.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은 종교적 환상과 자기파괴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천재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무겁다.

비트겐슈타인이 필자 가슴속에 들어온 계기는 여럿이다.

그가 1차 대전 참호 속에서 쓴 몇 줄의 일기가 나를 잠 못 들게 한 날이 있었고, 그가 케임브리지대에서 카를 포퍼와 논쟁을 벌이다 부지깽이를 들고 싸운 사건을 기록한 책을 읽고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기도 했다. 히틀러와 나란히 서 있는 그의 1904년 오스트리아 국립실업학교 졸업사진을 보면서 한 편의 드라마를 떠올렸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파이낸셜타임스(FT)가 게재한 특집을 더듬더듬 읽으며 그가 환생한 플라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최근 비트겐슈타인의 대표작 '논리 철학 논고'를 해설한 책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조중걸 지음)를 읽으며 난 또 비트겐슈타인 속을 허우적거렸다. 사실 그를 논한 해설서만 해도 대여섯 권은 족히 읽은 것 같다. 책에서 다시 만난 비트겐슈타인의 말들은 여전히 나를 심연 속으로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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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 주어지면 모든 가능한 사태가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다."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의 총체다."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에 있어서 너의 목적은 무엇인가? 파리에게 자신이 갇힌 병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이나 그림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정의하려고 하는 모든 형이상학을 '뻘짓'이라고 생각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그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면 된다. 그는 아무 망설임 없이 본질을 파고든 악마였다.

모든 천재가 그렇듯 그는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과 그 이후를 나눈 사람이다. 그를 통해 오랫동안 서양철학사를 지배해온 '의식의 문제'들은 '언어의 문제'로 탈바꿈하게 됐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최고 철강재벌의 아들이었다. 브람스 클라라 슈만 말러 등이 그 집의 식객이었다. 클림트는 그의 누이 초상을 그려주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원래 공학과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베를린 공대에 진학했을 때 그가 설계한 제트엔진은 학교를 발칵 뒤집을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이후 철학으로 전공을 바꾼 그는 강렬하고 지배적인 글과 행동으로 유럽을 떠들썩하게 하다 훌쩍 군에 입대해 1차 대전에 참전한다. 그의 대표작 '논리 철학 논고'는 전쟁터에서 쓴 것이다. 이후 그는 전 재산을 친구들과 예술가들에게 기부하고 정원사, 초등학교 교사, 약품 배달사원으로 일한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그는 무소유를 실천한 재벌 2세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못 말리는 악마성이 함께 있었다. 자신의 논문을 심사하는 교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절대로 이해 못하실 거예요"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고, 학생을 폭행해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지인들의 평가도 엇갈렸다.

실제로 경제학자 케인스는 그를 '신'이라고 표현했고, 버트런드 러셀은 그를 '악마'라고 칭했다.

천사든 악마든 우리는 지금도 비트겐슈타인 속을 헤맨다. 그는 하늘이 우매한 인간에게 내려준 '과제'였는지도 모른다.

[허연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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