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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 (월)

"신흥무관학교는 무장독립군 양성기관" 육군 역사 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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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적 장교 양성기관이었던 신흥무관학교가 11일 육군사관학교에서 재조명됐다. 육사는 이날 학교 충무관에서 ‘독립·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박일송 육사 교수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의 효시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 발표문을 통해 “1911년 설립된 신흥무관학교 등의 군사교육기관은 독립전쟁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육사의 정신적 정통성의 연원으로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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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독립군 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민족지사들이 1911년 6월10일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만주 서간도에서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될 때까지 항일독립투쟁의 기지였다.

이회영·시영 6형제 주도로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는 3500명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들은 만주·연해주 일대 항일투쟁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독립투쟁을 그린 영화 <암살>의 최동훈 감독은 “영화의 모티브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형제들이다”고 말했다. 영화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 ‘속사포’(배우 조진웅)가 생계형 독립군이라는 주요 배역으로 나왔다.

신흥무관학교는 영화에서처럼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항일독립운동의 기지였다.

신민회는 1909년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이동녕·이회영·장유순 등을 기지답사를 위해 만주에 파견했다. 1910년 7월 이들은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우선 정착했다. 대대로 문벌이 높았던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등 6형제는 1910년 전재산을 처분한 당시 돈 40만원(현재 600억원 상당)을 갖고 이곳으로 갔다. 이듬해 2월에는 경상도 안동 일대 혁신 유림과 지사들인 석주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의 가족들이 합류하고, 같은해 6월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열었다.

신흥강습소는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구국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켜 조국광복의 중견간부로 양성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신흥이라는 이름은 이회영 등이 참가했던 비밀항일단체 신민회(1907년)의 ‘신’에다가 나라를 부흥케 한다는 의미의 ‘흥’을 붙인데서 비롯됐다.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은 이동녕이 맡았다.

이들은 일제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강습소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중등과정 교육과 함께 군사과를 설치했다. 독립투사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1913년 신흥강습소를 신흥중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다. 나중에는 중학반을 폐지한 후 지방중학에 인계하고 군사반만 전력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찾아오는 청년들이 넘치자, 유하현 고산자 부근으로 본부를 이전함과 동시에 신흥중학교를 발전적으로 폐교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설립 이후의 행보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학교가 설립된 다음해부터 2년간 지속된 대흉작, 지방색에 의한 윤치국 학생 피살 사건, 마적에 의한 중견간부 윤기섭 등 납치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에 실망한 이시영은 봉천으로, 이동녕은 노령으로 가는 바람에 권위 있는 독립투사 양성기관이자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신흥무관학교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절망 속에서도 윤기섭·김창환·여준 등은 학생들의 굶주림을 달래며 학교의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3·1운동 후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했고, 만주에서도 무력항일투쟁을 벌였다. 이때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육군 중위 지청천, 윈난 사관학교 출신 이범석 등이 신흥무관학교에 합류했다.

그러나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과 잇단 사고 등으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가을 폐교했다. 폐교된 그 날 지청천은 생도 300명을 인솔하고 백두산지역 안도현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 부대와 연합했다. 그는 대한독립군단 결성에도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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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과 교과 과정

신흥무관학교는 설립 당시 교직원은 교장 이세영, 부교장 양규열, 학감 윤기섭, 훈련감 이장녕, 교관으로는 본교 졸업생인 박두희·성준용·백종렬·오상세·원병상 등이었다. 통화현쾌대모자, 임강현토애, 해룡현성수하자 등지에도 분교를 뒀다.

학과 과정은 하사관반 3개월, 특별훈련반 1개월, 장교반 6개월과정 등 3개가 있었다. 이들은 청산리전투의 대첩 등 독립전선 각 분야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다.

신흥무관학교는 군사교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사용된 병서들은 윤기섭이 일본군 병서와 중국군 병서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신흥무관학교는 학생들의 민족정신 함양에도 힘을 기울였다. 민족의식을 가진 인재들이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국어, 국사, 지리교육을 강조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은 청산리 대첩의 주역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될 때까지 독립투사 3500명을 양성했다. 만주와 연해주 항일투쟁 주역의 상당수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졸업생들은 주로 만주와 중국본토 등지에서 활약했다. 이들이 활동했던 대표적인 무장독립운동단체로서는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가 있다. 졸업생들은 만주지역의 대한통의부,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 주요 주무장독립운동단체에서도 활동했다.

중국 본토에서는 의열단과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으로 활약했다. <아리랑의 노래> 주인공 김산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독립군이 최초로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이겼던 봉오동 전투(1920년)와 일본군 토벌전에 맞서 싸워 대승했던 청산리 전투(1921년)의 핵심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이청천과 김동삼이 이끈 청산리 전투에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인 교성대 400여명이 참전했다.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이끌었던 석정 윤세주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윤세주는 1942년 일본군 40만명의 포위로 비롯된 태항산 전투에서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포위망을 뚫어 중일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산동성과 산서성 경계에 위치한 태항산 전투에서 윤세주는 전사했다.

<박성진 기자 longriv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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